푸른 피의 해결사’ 삼성 최형우
삼성 라이온즈 4번 타자 최형우는 '4'번 이란 숫자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에게 정작 '4'가 의미를 지닐 때는 4번의 찬스에서 4번 모두 성공할 때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가수 김원준의 인기는 야구장에서의 김현수(두산)만큼이나 높았다. 길거리에서 그의 히트곡 ‘쇼(Show)'를 흥얼거리는 이들을 보는 건 생경한 장면이 아니었다. 그 가운데 전주동중 야구부원 최형우도 있었다.
최형우는 틈만 나면 “Show! 끝은 없는 거야. 지금 순간만 있는 거야. 난 주인공인 거야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라는 ‘Show’의 가사를 흥얼거렸다.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계속 흥얼거리면 정말 세상의 주인공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부르다 보면 거짓말처럼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가장 멋진 야구선수로 우뚝 설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2007년까지 최형우의 인생은 그 반대였다. 세상의 주인공은 고사하고, 2002년 삼성에 입단한 이후 2004년까지 줄곧 2군에서 뛰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5시즌이 끝날 때 즈음엔 방출통보를 받았고, 입대지원서를 낸 상무에서조차 떨어져 야구인생의 끝까지 몰렸다. 어렵게 경찰청에 입대하긴 했지만, 당시 경찰청은 창단하지 1년밖에 되지 않는 신생팀이었다.
이때 그가 훗날 ‘Show의 주인공'이 될 것으로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단, 한 사람 예외가 있긴 했다. 바로 최형우(28) 자신이었다.
10여일 차로 서울, 사직 장외홈런에 도전했던 사내 최형우는 재능은 뛰어나지만 한때 성실하지 못한 선수로 불렸다. 2005년 방출된 주요원인이기도 했다. 최형우 스스로도 "그때는 어렸다"며 주변의 평을 인정한다. 경찰청에 입대하고서야 최형우는 자신에게 야구가 무엇인지 알았고, 땀의 소중함을 체감했다. 그가 제대할 즈음. 여러 구단에서 최형우에 영입 제안을 했다. KIA도 그 가운데 한팀이었다. 당시 KIA 스카우트였던 이건열 타격코치는 "몰라보게 달라진 최형우를 보고 깜짝 놀랐다"며 "영입을 시도했으나 결국 삼성으로 가는 바람에 대어를 놓쳤다"고 회상했다. 이 코치는 "올 시즌 최형우는 실투를 놓치지 않는 강타자가 됐다"며 "이후로도 계속 강타자로 남을 것"이라며 칭찬했다. 최형우가 다시 삼성 유니폼은 입은 데는 이유가 있다. 자신을 받아준 첫 팀에 대한 의리와 푸른 유니폼이 자신에게 가장 어울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사진=삼성)
5월 12일 잠실구장. 삼성과 두산의 경기를 중계하던 이용철 KBS 해설위원은 자기도 모르게 “이야!” 하는 감탄사를 터트렸다. 10년 넘게 야구 중계를 하면서 좀체 볼 수 없는 장면을 직접 봤기 때문이다. 흥분하긴 옆에 있던 캐스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8회 초. 삼성이 두산에 0-3으로 뒤지고 있습니다. 두산 투수는 지승민. 삼성 타자는 최형우입니다. 자, 7구째를 받아친 최형우. 타구는 오른쪽으로. 우측담장~ 우측담장~ 우측담장~. 오른쪽 장외로 넘어가는 솔로홈런! 장외홈런, 장외홈런입니다. 잠실구장에서 장외홈런을 기록하는 최형우!”
캐스터의 흥분한 목소리에 이 위원은 차분히 이 홈런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잠실구장에서 김동주(두산)가 오른쪽 타석에서 장외홈런을 기록한 바 있습니다만, 왼쪽 타석에선 최형우가 처음입니다. 대단합니다.”
그랬다. 1982년 개장 이래 국내 최장거리의 잠실구장에서 터진 장외 홈런은 ‘딱’ 한 번이었다. 2000년 5월4일 두산 김동주가 롯데전에서 때려낸 것이 유일했다. 비거리는 150m. 얼마나 기록적인 가치가 대단했으면 타구가 떨어진 자리에 장외홈런 기념판을 설치했겠는가. 선수들 사이에서도 김동주의 잠실구장 장외홈런은 ‘홈런 중의 홈런’으로 꼽힌다.
그로부터 10년 만에 최형우가 왼쪽 타석에서 장외홈런을 기록했으니 캐스터와 해설가가 흥분한 건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좌측 담장 뒤의 김동주 기념판에 이어 10년 만에 우측 담장 뒤에 최형우 기념판이 새겨지는가 싶을 즈음.
최형우의 타구가 장외가 아니라는 증언이 나왔다. 그러니까 타구가 장외로 넘어간 것이 아니라 잠실 외야 관중석 뒤 외벽을 때리며 아깝게 장내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현장에 있던 이 위원도 “슬로우 비디오로 돌려보니 관중석 외벽에 맞은 게 사실이었다”며 “몇 cm 차이로 역사적인 홈런이 평범한 홈런으로 남게 됐다”고 아쉬워했다.
아쉽기는 최형우도 마찬가지였을 터. 그러나 당시 그는 “파울이 안 돼 다행”이라며 되레 “3점 홈런이었다면 동점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솔로홈런에 그쳐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다.
잠실구장 관중석 외벽을 맞힐 만큼의 비거리에 대해서도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비거리가 130m로 측정됐다고 하자 “아, 그래요”하는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이는 삼성 선수들도 비슷했다. 왜냐? 최형우의 대형홈런을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기 때문이다. 올 시즌 최형우는 시쳇말로 ‘쳤다 하면 대형홈런’이다. 잠실뿐만 아니라 사직구장도 넘길 기세다. 실제로 넘길 뻔했다.
야구라는 무대 위에서 주인공이 된 최형우. 최형우는 팬 서비스에 열심인 선수이기도 하다(사진=삼성) |
1986년 개장 이래 사직구장에서 장외홈런을 기록한 이는 롯데 이대호가 유일하다. 2007년 4월 21일 현대전에서 정민태(현 넥센 코치)의 공을 받아쳐 비거리 150m의 장외홈런을 기록했다. 최형우의 홈런이 장외홈런으로 판정난다면 이대호에 이어 사직구장 장외홈런 2호는 물론이려니와 왼손 타자 최초의 사직구장 장외홈런 기록을 세우는 셈이었다.
사직구장 왼쪽 담장 뒤에 잠실구장처럼 장외홈런을 기념하는 이대호 기념판이 설치된 만큼 이번엔 최형우 기념판이 생기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러나 이번에도 외야 관중석 최상단 외벽에 맞으며 장외홈런이 되지 못했다. 홈런 비거리는 12일 잠실구장에서처럼 130m.
10여 일 사이에 잠실과 사직에서 간발의 차로 장외홈런에 실패한 최형우의 감정이 궁금했다. “한 번도 장외홈런을 의식하지 않았기에 아쉬운 감정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최형우는 “지금 같은 컨디션이라면 언젠가 한번은 넘어가지 않겠느냐”라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대형홈런의 비결, 타격 3박자
“최희섭(KIA)!”
허구연 MBC 해설위원에게 “대형홈런 하면 생각나는 타자가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이다. 누가 아니겠는가.
올 시즌 최희섭은 홈런 10개를 때린 가운데 평균 홈런 비거리 123.5m를 기록했다. 송지만(넥센)의 평균 비거리 123.6m에 이어 0.1m 차로 2위다.
3월 28일 잠실구장 두산 전에서는 최형우처럼 장외홈런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최희섭이 누구나 장외홈런으로 판정할 만큼의 대형 홈런을 쳤기 때문이다. ‘장외가 맞다, 아니다’ 논란 속에서 결국 장내에서 최희섭의 홈런공을 잡은 이가 나오며 장외홈런이 아니라는 판정이 나왔다. 그래도 김동주 이후 최장 거리 홈런임엔 틀림없었다.
그러나 겸손이 습관인 최희섭은 최형우가 잠실구장에서 기록한 대형홈런이 더 대단하다는 견해이다. 자신보다 먼저 잠실구장 장외홈런을 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 최형우가 대형홈런을 칠 수 있는 타격의 3박자를 갖췄기 때문이다. 잠시 최희섭의 설명을 들어보자.
“(최)형우는 스윙이 짧고 간결하다. 특히나 백스윙에서 폴로 스루 때까지 군더더기가 없다. 팔꿈치도 몸에 바싹 붙어 통과하다 보니 배팅 포인트까지 최단 거리로 공을 칠 수 있다. 두 번째 장점은 정확한 타이밍이다. 형우의 스윙을 보면 뒷다리에서 앞다리로의 체중이동이 원활하고 마지막 타격 순간 때 강력한 허리회전을 동반한다. 보통 정확한 타이밍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스윙이다.
세 번째 장점은 노림수다. 요즘 투수들은 다양한 구종과 이닝마다 릴리스 포인트를 달리하기 때문에 노리고 치지 않으면 제대로 맞추기 어렵다. 형우를 볼 때마다 투수들의 특징을 제대로 알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 세 가지 장점이 바탕이 됐기에 대형홈런을 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덧붙여 최희섭은 최형우를 “자기 스윙을 할 줄 아는 타자”라고 했다. “타격 타이밍이 어긋나고 원하던 코스로 공이 오지 않아도 자기 스윙을 할 줄 아는 타자가 거포”라는 게 최희섭의 생각이다.
5월 21일 사직 롯데전에서 최형우는 타격폼이 무너진 가운데서도 자기 스윙을 해 2점 홈런을 기록했다(사진=삼성) |
“최형우는 확실한 자기 스윙이 있다. 원하지 않은 코스로 공이 와도 타격폼이 무너지는 법이 없다. 엉덩이가 빠진 상태에서 ‘톡’ 쳐도 타격 메커니즘만은 변함이 없다.”
노림수에 대해서도 최희섭과 의견이 같았다.
“2008년부터 풀타임으로 뛰기 시작한 이후 경험이 붙으면서 투수들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전력분석팀에 자주 찾아와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자신만의 노하우로 투수들의 특성을 파악했다.
투수들의 견제가 심해진 올 시즌엔 예전처럼 무턱대고 배트를 휘두르는 게 아니라 정확히 한 구종을 선택하고 그 공만 기다리는 인내심을 갖게 됐다.”
그렇다면 최형우의 생각은 어떨까.
“외부의 평가가 맞다. 올 시즌엔 노림수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아졌다. 볼 카운트와 주자 상황, 투·포수의 성향을 파악해서 한 구종만 노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어차피 야구는 데이터의 싸움이자, 두뇌 싸움 아닌가.”
5월 25일 대구 SK 전에서 최형우는 국내 최고 왼손투수인 김광현을 상대로 2점 홈런을 터뜨렸다. 경기 전까지 역대 김광현과의 전적에서 14타수 3안타 타율 2할1푼4리로 절대적 열세를 보였던 터라 이 홈런은 우연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우연과는 거리가 멀었다. 노림수가 돋보인 장면이었다.
최형우는 노스트라이크 원볼에서 김광현이 슬라이더를 던지리라 예상했다. 그것도 유인구가 아닌 스트라이크 잡는 슬라이더를. 아니나 다를까 김광현은 포수 미트 한가운데로 슬라이더를 던졌고, 최형우는 고민할 필요없이 배트를 힘껏 휘둘렀다. 이 홈런으로 삼성은 SK에 14-1 대승을 거뒀고 남은 2경기에서도 거함 SK를 잡을 수 있었다.
최형우가 꼽는 대형홈런의 또 하나의 비결은 배트다. 최형우는 스프링캠프에서 지난해까지 사용한 ‘33.5인치(약 85.1cm)-870g’의 배트를 올 시즌부터 ‘34인치(86.4cm)-910g’짜리 배트로 바꿨다. 그러니까 배트 길이와 무게를 동시에 늘린 셈이었다. 이유는 자명했다.
“중심타자라면 팀을 위해 더 많은 장타를 쳐야 한다. 지난해 23개의 홈런을 쳤지만, 거기에 만족할 순 없는 일이었다. 조금 부담스럽더라도 배트 길이와 무게를 늘려 팀에 더 보탬이 되자고 다짐했다.”
다짐을 현실로 옮기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서 최형우는 손목이 아팠다. 갑작스레 배트 무게를 늘렸으니 손목이 놀란 건 당연했다. 하지만, 최형우는 참고 버텼다. 손목이 새로운 배트에 익숙해지도록 더 많이 스윙했다.
오키나와 스프링캠프가 끝날 즈음. 선동열 삼성 감독은 “라이온즈의 4번 타자는 최형우”라고 못을 박았다. 훈련과정을 지켜보며 최형우야말로 개인 성적보다 팀 성적을 우선하는 타자라고 봤기 때문이다.
푸른 피의 해결사, 최형우
5월 28일까지 최형우는 타율 2할7푼5리 11홈런 54타점을 기록 중이다. 홈런은 최진행(한화), 홍성흔(롯데)에 이어 3위, 타점은 홍성흔에 1점 차로 뒤진 2위다. 한방으로 전세를 역전하고, 득점기회를 반드시 살려야 하는 4번 타자로서, 자신의 임무를 누구보다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특히나 최형우의 해결사 능력은 입이 쫙 벌어질 만큼 대단하다. 올 시즌 최형우는 47경기에 출전해 9개의 결승타를 때렸다. 이 부문 단독 1위다. 팀이 기록한 26승 가운데 30%를 자신이 책임진 것이다.
이렇듯 결승타가 많은 건 득점권 타율이 높기 때문이다. 올 시즌 최형우의 득점권 타율은 3할6푼5리다. 이 부문 8위다. 그러나 득점권 타율 10걸 가운데 중심타자는 4위 이대호, 5위 홍성흔(롯데)과 최형우뿐이다.
1위 이종욱, 2위 손시헌(두산), 7위 정근우(SK), 9위 이대형(LG) 등은 선두타자 혹은 하위타순에 배치된 타자들이다. 득점 생산에 대한 강박관념이 중심타자들보다 덜 하다. 투수들도 중심타자들보다 덜 견제한다. 이대호, 홍성흔, 최형우의 득점권 타율이 더 주목받는 이유다.
최형우는 삼성 입단 당시 포수였다. 경찰청에 입대하고서야 외야수 훈련을 받았다. 타격에 비해 수비가 약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형우는 앞으로 수비에서도 좋은 야수가 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최형우의 가장 큰 매력은 그의 성장이 아직 '현재진행형'이라는 데 있다. 그리고 그가 그것을 인정한다는 데 있다(사진=삼성) |
여기다 이대호, 홍성흔이 3할3푼 이상의 고타율을 유지하는 데 반해 최형우의 시즌 타율이 2할7푼5리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득점권 타율이 무려 9푼이나 높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최형우는 주자만 있으면 힘을 내는 걸까.
“누상이 텅 비었을 때보다 주자 있을 때가 더 재밌다”는 게 최형우가 밝힌 득점권 타율이 높은 이유다. 주자 있을 때가 재밌다라, 사실일까. 정말이었다.
“투수 대부분은 주자가 있을 때 더 많이 연구하고, 고민한다. 나 역시 더 긴장한다. 하지만, 그 순간이 가장 재밌다. 치열하게 수 싸움 하는 것도 재밌고, 팽팽한 긴장감도 어느 순간엔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과거 삼성의 4번 타자였던 이만수 SK 수석코치는 “결정적인 순간에 타점을 올려 관중을 기쁘게 하는 존재가 바로 4번 타자”라고 말한다. 야구가 인생이자 한 편의 드라마라고 생각하는 이 수석코치는 그래서 “4번 타자야말로 야구라는 무대의 주인공”이라고 강조한다.
“무엇보다”를 말하다 잠시 침묵하던 최형우가 개나리처럼 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야구’라는 멋진 쇼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다. 비록 아직 부족하고 다듬을 부분이 많지만, 내 안타와 홈런을 나보다 더 기뻐하고 환호하는 팬과 팀이 있는 이상 ‘쇼’는 계속 될 거다.”
5월 27일 대구 SK 전에서 최형우는 7회 말 1, 2루에서 SK 김선규로부터 홈런을 뽑아냈다. 5-5 동점에서 나온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3점 홈런이었다. 이 홈런으로 삼성은 SK를 8-5로 이겼고 최형우는 이날 또다시 ‘야구’라는 무대의 주인공이 됐다. 최형우에게 홈팬에게 헬멧을 벗고 감사의 인사를 전할 때 관중석에선 이런 노래가 나왔다.
“Show! 삼성의 최형우 Show! 삼성의 최형우. 넌 주인공인 거야~ 언제까지나 영원히~ 너와 함께~”
최형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간명하다. 노력은 매일의 시행착오이므로 결코 쉬지 않다보면 누구나 세상이라는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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