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그늘들의 초상/최호빈
당선 소감-“멋진 병, 현기증이 나에 대한 믿음 되살려”
한 인간이 있었다. 그는 세상을 전부 이해하기 위해 한 인간에 만족하지 못하고 모든 인간이 되길 바랐다. 한때 내 몸은 그의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에 반항하기 위해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영혼이 아니라 그의 죽은 몸을 닮고 있었다. 스무 살의 겨울, 몽마르트 언덕에서 길을 헤매던 중 한 묘지로 들어갔고 처음 본 공동묘지에 그를 내려놓았다. 파리의 지붕들을 뛰어다니던 그에겐 밟고 다닐 무덤들이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빈자리가 말을 건넨다. “나는 침묵과 밤에 대해 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에 유의했다. 나는 현기증을 응시했다.”
얼마 전 흑백의, 내 머릿속 사진을 보았다.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커다랗고 외로운 눈(目)이었다. 그 눈은 대답을 무한히 지연시키는 질문만을 내게 건네는 듯했다. 아무 문제 없다고 의사는 말했지만 그 이후로 나는 눕거나 일어날 때 어지럼증을 느낀다. 그것은 마치 내 안에 살았던 기억과 감정들이 깨어나면서 나에 대한 불신들 사이에 나를 믿게 만들 씨앗을 흩날리는 것 같았다. 살아있다. “멋진 병”에 걸렸다. 다행이다.
아버지, 어머니에게 고마움과 건강히 오래 지켜봐주길 바라는 아들의 마음을 전한다. 시 쓰는 길을 열어주시고 큰 관심을 가져주신 최동호 선생님과 ‘곧’이라는 말로 격려해주신 선후배님께 감사드린다. 시 속에 숨어 있으려는 나를 밖으로 꺼내주신 멘토 권혁웅, 조연호 그리고 금요일의 선생님들과 친구들의 크고 달콤한 힘에 감사한다. 다른 내일을 열어주신 도종환, 박주택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 1979년 서울 출생 ■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석사과정 재학
심사평-“개성과 진실은 시를 계량하는 중요한 잣대” / 도종환·박주택 시인
신춘문예는 말 그대로 ‘새 봄의 문학’이다. ‘새 봄의 문학’은 혹한과 얼음을 이긴 ‘새싹의 문학’이자 ‘꽃핌의 문학’이다. 이는 오랜 탁마와 절치부심(切齒腐心)의 순간을 견디며, 개성적인 세계를 창조하려는 노력 끝에 찾아오는 문학이다. 이 점에서, 시를 구성하는 미적 형식과 내용을 직조하는 시선, 제재를 가공하는 세공술, 그리고 이를 각고로 새겨 돋우는 치열한 정신은 ‘새 봄의 문학’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예술적 덕목들이다.
예심에서 올라온 시편 중에서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끈 것은 시가 지니고 있는 본령을 견지하면서도 개성적 시각으로 삶의 진실을 드러낸 것들이었다. ‘개성’과 ‘진실’은 시를 계량하는 중요한 잣대로 ‘지금까지, 어떻게 썼는가’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관심을 포함하고 있어 미래적이다.
당선작 ‘그늘들의 초상’은 대상과 세계를 해석하는 강한 추동력과 낮은 자의 고통을 존재의 장소에서 불러내는 동일자의 윤리를 보여준다. 함께 투고한 시편도 고르게 완성도가 높아 높은 점수를 받았다. 후보작 ‘곰탕’은 조곤조곤한 어조로 “뼛속까지 곰삭은 그리움을 푹 고아내고 나면 눈꽃처럼 퍼지는 풍경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와 같이 세계를 긍정한다. 그러나 산문적 사변(思辨)이 골격을 이루고 있어 아쉬움을 남겼다. ‘로켓맨’은 시적 형상화라는 측면에서 튼튼한 신뢰를 얻고 있지만 대상과의 간격이 지나치게 좁은 것이 흠이었다. ‘그 자작나무 숲으로’는 참신하기는 하나 주제를 드러내는 데 인색했다.
모두에게 “날씨가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안다”는 말과 같이 ‘견인’과 ‘겸양’을 함께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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