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시조

[스크랩] 2008년 정기답사 1차 집결지인 "도산서원" 미리보기 참고자료

영관님 詩 2010. 5. 20. 20:42

도산서원(陶山書院)-<史蹟 제170호>

 



-동방의 명현 퇴계를 모시는 서원-


도산서원(陶山書院)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사림에서 세운 사액(賜額) 서원(書院)이다.

선생이 처음 명종 12년[1557]에 이곳 산수 좋은 언덕을 택하여

도산서당(陶山書堂)과 농운정사(隴雲精舍)를 건립하여 많은 제자를 길러 내었다. 그후 선생께서 서거(逝去)하자 사림(士林)의 발기(發起)로 서당 뒤편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였다.


서원의 건물은 모두 30동인데 경내(境內)와 주위(周圍)임야(林野)를 포함 총 98,296평을 보호구역(保護區域)으로 묶어 사적 제170호로 지정 안동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예로부터 이곳은 경치가 빼어나 <擇里志>에는 계승(溪勝)의 제일로 기록했고 뒷사람들은 안동팔경(安東八景) 중 하나로 <退溪門下洛江流>라 하였다.

 
1. 서원(書院)의 연혁(沿革)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이 처음 지은 <도산서당>이 전신(前身)이다. 1557년 도산의 남쪽에 터를 잡고 손수 마련한 청사[室舍圖]으로 법연(法蓮)이란 중을 시켜 서당을 짓기 시작했는데 뜻하지 않는 그의 죽음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다시 중 정일(淨一)로 하여금 조영(造營)케 되었다.

1560년 11월에 서당 3칸을 준공했다. 헌(軒)은 암서(巖栖), 재(齋)는 완락(玩樂)이라 하고 도산서당(陶山書堂)의 편액(編額)을 걸었다. 또 서편에 정사(精舍) 8칸을 세워 헌은 관란(觀蘭), 재는 시습(時習), 요(寮)는 지숙(止宿)으로 곧 농운정사(隴雲精舍)라 하였다. 당(堂)을 정남방(正南方)으로 한 까닭은 행례(行禮)에 편하고자 함이고 재를 정서향(正西向)으로 한 은 원포(園圃)를 마주하여 그윽한 운치(韻致)를 숭상(崇尙)함이다.

그밖에 방실, 곳간, 문호는 제각기 뜻이 있다.[아래 설명 참조] 여기에 걸린 모든
편액(編額)은 선생의 필적인데 경제잠(敬齋箴), 백록동규(白鹿洞規), 명당실기(名堂室記) 등을 벽에 걸어 두었다.

암서헌(巖栖軒)의 위치는 방향(方向)이 양용삼문(陽用三門)의 제도인데 삼면에
퇴주(退柱)를 세워 동면으로 익랑(翼廊)을 덮었던 까닭에 매우 시원하고 수려(秀麗)하다. 방의 서쪽 벽에 서가(書架)를 만들었고 격장(隔墻)을 두어 그 반(半)을 침실(寢室)로 하였다. 이유를 물었더니 ‘성현(聖賢)의 경훈(經訓)을 등뒤에 두는 것은 온당(穩當)치 못하다’ 하였다.

이 가운데 고서(古書) 천여 권을 좌우 서가에 나누어 꽂았다. 방에는 화분 한 개,
책상 한 개, 연갑(硯匣) 하나, 지팡이 한 개, 침구, 돗자리, 향로, 혼천의(渾天儀)를 놓아두었다. 벽에는 시렁을 만들어 옷장과 서류를 넣고 서통(書筒)을 두었다.

[성제(惺齊) 금난수(琴蘭秀)의 도산서당기(陶山書堂記)]


서원(書院)은 선생이 서거(逝去)한지 2년 뒤에 제자의 발기(發起)로 위패(位牌)를
상덕사(尙德祠)에 모시기로 결정되어 1574년에 상덕사(尙德祠), 전교당(典敎堂), 동서재(東西齋) 가 낙성(落成)되어 사림(士林)이 모인 가운데 위패를 봉안(奉安)하고 도산서원(陶山書院)이라 하였다.

후일 선조(宣祖) 임금은 한석봉(韓石峰)의 글씨로 편액(編額)을 하사(下賜)하여
명실공(名實共)히 사액(賜額)서원이 되었다. 서원의 향사축문(享祀祝文)은 월천(月川) 조목(趙穆)이 지었다.

心傳孔孟 道紹閩洛 集成大東 斯文準極

공맹을 심전하고 정주를 이어 받아 대동에서 집대성하셨으니 사문의 지극한
사표이시다. 원규(院規)는 퇴계(退溪)가 지은 이산원규(伊山院規)를 그대로 습용(襲用)했다. 이는 선생의 교육관(敎育觀)이 뚜렷하게 서려 있어 후에 영남(嶺南)의 각 서원에서는 이를 모두 준용하였다.

2. 위대한 동방(東邦)의 주자(朱子)


▣ 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대학자(大學者)이다. 자(字)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시호(諡號)는 문순(文純)이며 본관(本貫)은 진성(眞城)이다. 진사(進士) 식(埴)의 아들로 안동시 도산면 온혜에서 탄생(誕生)하였다.

어머니는 두 분인데 전모(前母)는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슬하(膝下)에 2남 1녀를
두었고 퇴계는 친모(親母) 춘천박씨(春川朴氏)의 소생 으로 5남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불행(不幸)하게도 생후 7개월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 어머니 박씨는 ‘너희들은 과부(寡婦)의 자식(子息)이라 비난(非難)받기 쉬우니 남들보다 백배(百倍) 공을 쌓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라고 항상 훈육(訓育)하였다. 양육(養育)은 숙부(叔父) 송재(松齋)가 했는데 6세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12세에 벌써 이(理)를 깨우쳤다.

이마가 넓어서 숙부는 그를 늘 광상(廣顙)이라고 불렀다.

8세 때 형이 잘못으로 칼에 손이 베여 피가 흐르자 퇴계는 큰소리로 울었다고 한다.

어떤 부인이 묻기를 “형은 울지도 않는데 너는 왜 우느냐?” 했더니 “형은 비록 울지는 않지만 피가 저렇게 흐르니 얼마나 아프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하니 그 나이에 벌써 할반지통(割半之痛)을 느꼈던 것이다.

20세에는 주역을 읽었고 21세에 장가들어 허씨 부인을 아내로 맞았다. 부인 허씨
(許
氏)의 어머니는 문씨(文氏)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의 종이모(從姨母)이다.

27세에 진사가 되었으나 불행(不幸)하게도 그해 11월에 아내 허씨 부인이 작고하므
로 상처를 했다. 29세에 진사회시에 2등으로 합격했고 30세에 비로소 재취(再娶)하니 권질(權礩)의 딸이 그 아내다. 선생은 후일 그의 장인의 호를 사락(四樂)이라 지었다. 사락이란 1] 농사하고 2] 누에치고 3] 낚시하며 4] 나무하는 일이다.

34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로 나셨으니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거쳐 예문관검열(禮文館檢閱)을 지냈고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직하였다.
36세때 어머니 박씨의 상(喪)을 당하여 잠시 낙향 3년상을 치르고 상경하여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지제교겸경연검토관(知製敎經筵檢討官)이 되었다.

기사사화(己巳士禍)가 일어나자 벼슬의 뜻을 버리고 낙향하여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학문에만 전념(專念)하였다.

일찍이 서울에 있을 때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읽고 여기에 몰두(沒頭) 성리학(性
理學)을 연구하여 마침내 대성(大成)함으로 동방(東邦)의 주자(朱子)란 칭호(稱號)를 받게 되었으니 많은 학자들이 몰려와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퇴계는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만들어 선조(宣祖)께 올리니 왕은 이를 나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다.

ꡔ성학십도ꡕ는 성리학(性理學)의 요결(要訣)이라 평가되었고 그 덕성(德性)과
교화(敎化)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크게 믿치었음으로 그 공적(功績)은 매우 공경(恭敬)을 받고 있다.

선생은 조정의 부름을 거역(拒逆)할 수 없어 벼슬길에 나아가서도 오래 머물지를
않았고 부득이한 경우는 외직(外職)을 자청하였다. 중요(重要)한 관직(官職)은 단양(丹陽)과 풍기군수(豊基郡守), 대사성(大司成), 지중추부사겸지경연(知中樞府事兼知經筵), 예조판서(禮曹判書)등을 지냈는데 출사(出仕)이래 90개 직종(職種)에 140회나 임명되었고 79번을 사양(辭讓) 했다.

저서(著書)로는 변론(辯論), 저술(著述) 편저(編著)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송계
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심경석의(心經釋疑),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계몽전의(啓蒙傳疑), 사단칠정(四端七情) 분리기서(分理氣書)가 대표적이다.

선생은 선조3년(1570) 11월에 득병(得病)하자 유계(遺戒)하기를 자신의 묘에
갈명(碣銘)을 <退陶晩隱 眞城李公之墓>로 하라고 하였다. 그해 12월 신축(辛丑)일 정침(正寢)에서 시병자(侍病者)의 부축으로 일어나 앉은 채로 편안히 운명(殞命)하였다.

부음(訃音)이 조정(朝廷)에 전해지자 임금께서는 한없이 슬퍼하며 우부승지
(右副承旨) 이재민(李齋閔)을 보내어 조상(弔喪)케 하고 이어서 우승지(右承旨) 유홍(兪泓)을 다시 보내어 제사(祭祀)를 지내도록 하였으니 이는 전례(前例)에 없던 특유한 절차였다.

그후 선생에게는 대광숭록대부(大匡崇祿大夫), 영의정겸영경연(領議政兼領經
筵),홍문관(弘文館), 춘추관(春秋館), 관상감사(觀象監事)로 추증(追增)되었다.

1574년 사림의 발기로 서당 뒤편에 사우를 세워 위패를 봉안하고 도산서원이라
하였으며 매년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일에 향사한다.

◎ 선생의 자호(自號)

* 46세때에
토계의 지명 토(兎)자를 퇴(退)자로 고쳐

  <퇴계(退溪)>라 하였고

* 50세때에 도산서당을 짓고 거기서 기거(起居)하며

  <도옹(陶翁)>이라 했으며
* 70세때에 임종시 유계하여 이젠 도산에 돌아왔다는 뜻으로

  <퇴도(退陶)>라 했다.

선생은 이 수려한 도산과 퇴계의 자연 명칭으로 자호(自號) 하였으니 도산을 따서
도옹(陶翁), 도수(陶叟), 도산(陶山), 도노(陶老), 도일(陶逸)이라 했고, 퇴계를 따서는 계노(溪老), 퇴계(退溪), 계옹(溪翁), 병계(病溪)라하여 자신을 지극히 낮추었다.
또한 영지산인(靈芝山人)이라고도 했으며 돌아가시면서 도산(陶山)과 퇴계
(退溪)를 못내 잊으심인지 <퇴도(退陶)>라 하였다.

◎ 시호(諡號) : 문순(文純)

道德博聞 曰文 : 도덕이 있고 널리 들은 것은 문이요
中正精粹 曰純 : 중립해서 바르고 순수한 것은 순이다.


3. 서원(書院)의 건물(建物)

▣ 도산서당(陶山書堂)




선생께서 직접 이곳에서 기거(起居)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길러낸 건물이다. 155
7년에 착공하여 4년만에 완공 했는데 방은 완락재(玩樂齋),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 한다.

◉ 완락재(玩樂齋)

락이완지(樂而玩之)란 주자의 명당실기(名堂室記)에서 따온 말이다.

<樂而玩之 固足以終吾身而不厭> 즉, ‘도(道)와 리(理)를 즐기고 완상(玩賞)하며 죽을 때까지 싫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암서헌(巖栖軒)

암서(巖栖)란 뜻은 속세를 떠나 산다는 말로 주자의 운곡시(雲谷詩)에
나온다. <自信久未能 巖栖冀微效> 즉, ‘학문에 자신이 오래도록 없었는데 바위에 기대서 라도 작은 효험을 바란다’는 뜻이다.

▣ 농운정사(隴雲精舍)

제자(弟子)들이 기숙(寄宿)하면서 공부(工夫)하는 집이다. 공(工)자
모양의 평면(平面)을 가진 것은 공부를 의미한다. 제자들이 공부하는 마루는 시습재(時習齋)라 하고 쉬는 마루는 관란헌(觀蘭軒)이라 하였다.
<농운(隴雲)>은 고개위에 걸려있는 구름이고 <정사(精舍)>는 정신을
수양하고 학문을 연구하며 가르치는 집을 뜻한다.

◉ 시습재(時習齋)

논어의 첫장 학이편에 나오는 <學而時習之 不亦悅乎>에서 따온 것인데

‘배워서 때때로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하랴’란 뜻이다.

<時習>이란 말은 주자대전에 “庶有開於時習” 즉, ‘시습하며 공부를
깨우칠
것’이라 했고 “而吾時習之功” ‘나의 때때로 익히는 공이다 ’라고 하였다.

◉ 관란헌(觀蘭軒)

맹자에 “觀水有術 必觀其蘭”이란 글에서 따온 것으로 ‘물을 보는데도

법이 있으니 반드시 물결치는 이치를 살펴봐야 한다’로 <觀蘭>이란 수중의 큰 물결을 잘 관찰한다는 뜻이다.

◉ 지숙요(止宿寮)

지숙이란 어떠한 곳에 머물러 잠을 잔다는 뜻이다.

논어에 <止子路宿 殺鷄桼 而食之>

‘자로를 붙들어 자고 가게 하고 닭잡고 밥지어 대접하였다.’란 글이 있다.

이것은 자로가 어느 날 공자를 따라 가다가 뒤떨어졌는데 어떤 노인이 지팡이에
삼태기를 지고 있었다. 자로가 그 노인에게 묻기를 “영감! 혹시 공자님을 못 봤습니까?” 하니 노인은 “손발을 부지런히 놀리지 않고 오곡을 분간하지 못하니 누가 선생이라 하겠는가?” 하면서 지팡이를 땅에 꽂고 잡초만 뽑는 것이다. 자로는 그만 두손을 마주잡고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만에 그 노인은 자로를 묵어 가게 허락하고 닭을 잡아 수수밥을 지어 대접하며 자기의 아들도 만나게 했다.

이튿날 자로가 떠나와서 이 일을 공자에게 말씀 드리니 “그분은 은자(隱子)니라
다시 돌아가서 만나 보아라” 하거늘 그곳에 찾아갔더니 노인은 어디론지 떠나고 없더란 것이다. 이에 자로는 “벼슬하지 않는 것은 이롭지 않다. 어른과 이이의 예절도 없앨 수 없는데 임금과 신하의 의리(義理)를 어떻게 없앨 수 있겠는가?

자기 몸을 깨끗이 하려다가 큰 인륜(人倫)을 어지럽힌다. 군자가 벼슬을 하는 것은 자기의 의리를 지키는 것이다. 정도(正道)가 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시는구나” 하였다.

▣ 상덕사(尙德祠)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祠堂)이다. 퇴계를 주향(主享)하고 월천을 배향
(配享)했다.<尙德>이란 덕을 높이 생각한다는 뜻이다. ‘君子哉若人 尙德哉若人’이란 논 어에 나오는 것으로 이는 ‘군자로다 이 사람이여 ! 덕을 숭상 하도다 이 사람이여!’란 뜻이다.

▣ 전사청(典祀廳)

전사(典祀)란 조선조 장례원에 소속된 제사(祭祀)일을 맡아보는 곳으로
서원에서는 향사(享祀)할 때 쓸 제물(祭物)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 전교당(典敎堂)



전교(典敎)란 <顯宣尼之典敎>란 글에서 따온 것으로 공자의 법과 교를 밝힌다는
것인데 <典敎> 즉, <늘 지켜야 할 가르침, 가르침을 담당한다>는 뜻이다.[宣尼 : 文宣王 仲尼, 곧 공자를 말한다]

이 건물은 서원의 강당(講堂)으로 한존재에는 원장(院長)이 기숙한다.

◉ 한존재(閑存齋)

閑存은 헛된 생각을 막고 성심을 보존한다는 뜻이다. 주역에 ‘子曰 龍德而正中者也
庸言之謹 庸行之謹 閑邪存其誠 善世而不伐’ 용덕이 있으면 서로 바르고 가운데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항상 말을 함에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행동함에는 항상 조심하고 간사하지 않토록 하며 그 성실함을 보존 한다면 세상을 착하게 하지만 자랑을 아니 하느니라란 글에서 따온 것이다. 한존은 또 심경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

내세를 밝게 보아서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홀로 삼가며 사악을 막고 정성을 다하니
성나는 것과 걱정 스러운 것은 반드시 막고 고치니 상제가 이에 임하시다.

(紹示來世 戒懼謹獨 閑邪存誠 曰忿曰懲 必窒必懲 上帝寔臨).

▣ 동서재(東西齋)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방이다. 동은 ‘박약재(博約齋)’ 서는 ‘홍의재
(弘毅齋)’라 한다.

 

◉ 박약재(博約齋)


박약(博約)은 논어의 박문약예(博文約禮)에서 따온 말이다. 널리 글을 배우고
로써 절제하면 도가 어긋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학자가 폭넓은 학문을 하여 교양을 풍부하게 쌓는 동시에 이것을 집약하여 실행하는데 있어 예(禮) 즉 바른 생양식을 규범으로 한다면 어긋나지 않아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 홍의재(弘毅齋)


넓고 의연한 마음 가짐을 홍의(弘毅)라 하는데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선비는
너그럽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니 임무가 무겁고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인(仁)을 자기의 임무로 맡았으니 또한 무겁지 아니하랴? 죽은 뒤야 그만 둘 것이니 또 멀지 아니한가?

▣ 진도문(進道門)

진도는 학문을 하여 나아간다는 뜻이다. 근사록(近思錄)에 ‘明道若昧 進道
若退’란 글이 있으니 곧, ‘도를 밝히는 것은 우매한 것 같이하고 도에 나아 감에는 물러 서서는 안된다’란 뜻이다.

▣ 광명실(光明室)


‘萬卷書籍 惠我光明’이란 주자의 사언시 중에 나온다. <만권의 서적이 내게
광명을 안겨 주는구나>란 뜻이다. 광명실은 동서 두 개가 있는데 동 광명실에는 퇴계가 직접 보던 책들이 있고 서광명실은 근래의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 장판각(藏板閣)

전교당 동쪽에 있는 집으로 출판소(出板所) 역할을 하였다. 서원에서 찍어내
는 여러 가지 서책의 목판을 보관하는 곳이다. 퇴계 문집을 비롯한 유묵(遺墨),언행록(言行錄), 도산 12곡, 선조어필(宣祖御筆), 병서(屛書), 액자(額字) 등 총 2,790장의 목판(木板)이 보관되어 있다.

▣ 옥진각(玉振閣)

퇴계의 유물을 전시한 곳이다. 1970년에 현대식 콘크리트조로 지었다. 이곳에
진열된 유품은 모두가 선생이 사용하던 일용품인 문방구와 실내 비품으로 하나같이 소박하고 검소하며 외면적인 꾸밈이나 사치(奢侈)를 떠나 오직 청빈(淸貧)에 만족한 도학자(道學者)다운 일면을 엿볼 수 있다.

▣ 퇴계태실
도산면 온혜리 노송정 종택에 있는 특이한 건축구조물이다. 종가 중심에
자리한 것으로 자손을 잇는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구조물이다.

 

▣ 퇴계묘소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의 천년 유택(幽宅)이다. 묘전비 전면에는 관작을 쓰지 않고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간결하게 적혀 있는데, 이는 선생의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선생께서 손수 지은 자명(自銘)과 제자인 고봉 기대승이 지은 묘갈명이 새겨져 있다. 묘소에는 아담한 봉분과 동자석 2, 망주 2, 문인석 2, 묘비 1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매우 간결하고 조촐한 느낌을 주고 있다. 건지산 묘소로 오르는 길에는 돌계단이 마련되어 수월하게 오를 수 있다. 빗돌의 글씨는 당대의 명필로 ‘선성삼필(宣城三筆)’ 중의 한 분으로 칭송을 받았던 금보(琴輔)가 썼다. 현재의 비는 1905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 진열된 유물(遺物)

1] 실내비품 

    완석(莞席), 안석(案席), 장추(長箠), 등경(燈檠),

    백자타호(白磁唾壺)

2] 문방구 

    매화연(梅花硯), 옥서진(玉書鎭), 흑단연(黑端硯),

    연갑(硯匣), 서기(書丌)

3] 청려장(靑藜杖)
4] 매화등(梅花凳)
5] 투호(投壺)
6] 혼천의(渾天儀)
7] 서적류 

    성학십도(聖學十圖), 사문수간(師門手簡),

    퇴계서초(退溪書抄),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퇴계문집(退溪文集), 심경후론(心經後論),

    계몽전의(啓蒙傳疑) 등 다수.

※ 참고[註]


성학십도(聖學十圖) : 성학(聖學)의 대강을 도해(圖解)한 책. 1568년[선조1]에 퇴계가 저술 하였다. 이것으로 퇴계는 선조에게 경연을 시강했다.

성학이란 개념은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제왕학, 인간교육의 핵심, 또는
성왕이 되게하는 학문이다. 구성내용은 성학을 열가지 도식으로 만든 것인데 제 1도에서 5도는 태극(太極)도, 서명도(西銘圖), 소학도(小學圖), 대학도(大學圖),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는 천도(天道)에 근본을두어 인륜을 밝히고 덕업에 힘쓰는데 공이 있는 것이라 했고 제6도에서 10도는 심통성정도(心統性精圖), 인설도(仁說圖), 심학도(心學圖), 경재잠도(敬齋箴圖),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는 심성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일상생활에 힘쓰고 경외를 높혀야 한다고 했다.

▣ 역락서재(亦樂書齋)

이 건물은 엄격히 말해서 도산서원의 건물은 아니다. 선생의 제자인 지헌
(芝軒) 정사성(鄭士誠)을 공부시키기 위해 그의 부친이 특별이 지어준 별개의 건물이다. 역락(亦樂)은 퇴계의 친필인데 논어에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따온 것이다.


▣ 도산잡영(陶山雜詠)

퇴계는 도산서당과 주위의 자연을 7언시와 5언시로 노래 하였다. 그중
몇가지를 적는다.

1] 정우당(淨友塘)

도산서당 앞 마당에 있는 작은 연못이다. 이곳에 연(蓮)을 심어 연꽃과
더불어 벗했다.
연꽃은 더러운 흙탕 물속에 자라지만 때묻지 아니한 고운 꽃을 피우므로
그 고결(高潔)함을 퇴계는 완상(玩賞) 하였다.

<堂之東便 鑿小塘種 蓮其中 曰 淨友塘> 서당의 동편에 작은 연못을 파고
그속에 연꽃을 심었으니 못이름을 <정우당(淨友塘)>이라 한다.

2] 절우사(節友社)

서당 동쪽에있는 산기슭에 화단을 말한다. 이곳에 선생은 대나무, 매화,
국화, 소나무를 심어놓고 수시로 산책하며 자연을 즐겼다.

3] 몽천(夢泉)

몽천이란 산밑에서 나오는 샘물이다. 몽이양정(蒙以養正)으로 곧, 바르게
가르친다는 의미다. 주역의 <象曰 山下出泉 蒙 君子以 過行育德> 산밑에 샘이 나는 것은 몽이니 군자는 이것을 본받아서 행동을 과단성 있게 행하며 덕을 기르는 것이다.

4] 유정문(幽貞門)

서당앞의 출입문에 싸리로 엮은 사립문을 말한다. ‘유정(幽貞)’이란 ‘그윽
하고 바르다’는 뜻인데 주역에 ‘履道坦坦 幽人貞吉’ 가는 길이 넓고 평탄하니 그윽한 곳에서 수도하는 사람이야 말로 바르고 길할 것이다.

5] 열정(冽井)

서원 앞 광장 동북편에 있다. 물이 차고 마시면 마음이 상쾌해진다.

열정은 찬물이다. 주역에 <井冽寒泉食> ‘물이 맑고 차가우니 마실 수 있네’란 글에서 이름하였다.

6] 곡구암(谷口巖)

서원 구길 지금은 안동호로 수몰되고 없지만 입구로 들어가는

곳에 바위 하나가 있었다. 이를 곡구암이라 한다.

東躡江臺北入雲 開荒谷口擬山門
此名偶似前賢也 耕隱風聲詎易論

동으로 강대 밟고 북으로 구름 뚫고 곡구암을 파열어 산마냥

만들었네, 옛 어진이 살던 땅과 이름 같지마는 농사로 은거하는 그멋을 어찌 쉽게 논할 손가[退溪]

7] 천연대(天淵臺)와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

서원의 앞쪽 강안(江岸)의 좌우절벽의 경치가 아름다워 동쪽은
천연대,
서쪽은 천광 운영대라 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이곳을 산책하였다.

◉ 천연대(天淵臺)

<천연(天然)>이란 하늘에 있는 못을 말한다. 바위 절벽에 새긴 글씨는
아계
(鵝溪) 이산해(李山海)[선조 때 영상]가 썼다. <鳶飛戾天 魚躍于淵> 솔개는 하늘높이 나르고 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 는 시전(詩傳)에 있는 구절이다.

◉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

햇빛과 구름의 그림자가 함께 돈다는 뜻이다.

活水天雲 鑑影光 觀書深喩 在方塘
我今得意 淸潭上 恰似塘淵 感歎長

하늘빛 구름 그림자 활수에 비추이니
글월 보는 깊은 비유 방당에 들어있네
나는 지금 맑은 못가에 참뜻을 얻으니
감탄을 길게하던 그시절과 꼭 같구려
[退溪]

8] 석간대(石間臺)

석간대는 서원 내주차장에서 시사단으로 건너가는 선착장 우측 언덕에 있다.

옛날 선생께서 제자 이귀암(李龜巖)을 작별하면서 읊은 당시(唐詩) 한귀절을바위에 새겨 두었다.

君去春山誰共遊 鳥鳴花落水空流
今朝送別臨流水 他日相思來水頭

그대 떠나가니 이봄 누구와 더불어 놀고 새울고 꽃은 떨어지니 물만 홀로 흐르네
이아침 물가에서 그대를 보내오 노니훗날 그리워 만나려면 물가로 다시오리라.

4. 퇴계(退溪)는 권질(權瓆)의 서(壻)

가. 권씨와의 결연(結緣)

‘이 사람 경호(景浩), 내가 자네에게 묻는 것은 자네가 아직 속현(續絃)1)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세. 자네가 내 집일을 잘 알고 있지를 않는가 ? 양대(兩代)가 입은 혼란에 내 여식(女息)은 혼이 나가 온전 하지를 못하이. 내 어디로 데리고 가겠는가!

더욱이 내가 적소(謫所)에 온지도 벌써 10년이 다 되었고 또 언제 풀려날지
기약조차 없으니 혼기(婚期)를 넘겨 버린다면 저애를 그냥두고 내가 눈을 감을 수는 없네.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부탁하는 것은 내딸을 데려가 달라는 것일세. 아무리 생각하고 궁리를 해봐도 자네 밖에는 믿고 맡길 사람이 없네.

자네가 쳐녀를 면케하여 이 죄인의 원을 풀어 주게.’

권질(權礩)은 사화(士禍)를 입고 예안으로 유배되어 있을 때 양대(兩代)가 겪은
악경 때문에 혼이 나가 온전치 못한 딸을 항상 걱정하던 중에 퇴계가 마침 상처(喪妻)를 하고 혼자 지내는 처지를 보고 부탁의 말을 한 것이다. 2)전술한 바이나 퇴계는 21세에 허진사댁에 장가들어 23세 아들 준(寯)을 낳았고 그때는 태학(太學)에 다녔다.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지낸 뒤인지라 선비들의 풍습이 부박(浮薄)하여 선생이 취하는 법도(法道)와 행동거지(行動擧止)를 오히려 비웃기만 하니 상종(相從)할 사람이라고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3)뿐이었다.

얼마 뒤 고향으로 돌아올 때 하서는 작별(作別)하는 시(詩)에 <夫子嶺之秀
李杜文章 王趙筆> 곧, <선생은 영남에서 빼어난 분이요 문장은 이백과 두보와 같으며 또 글씨는 왕희지와 조맹부를 비기리다 >라고 하였다.

정해(丁亥)년에 진사에 합격했고 10월에 둘째아들 채(寀)를 낳아 경사를
겹치더니 호사다마(好事多魔)라 이를 두고 했음인가, 불운하게도 11월에 허씨부인을 상처(喪妻)했다.

그 뒤 퇴계는 3년이 넘도록 새로 장가드는 것을 잊은채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때다. 권질은 예안에서 귀양살이를 한지 만 9년이 되던 해의 어느날 퇴계를 자기의 집으로 조용히 불렀던 것이다.

퇴계는 일찍부터 권주(權柱, 호 花山)의 명문(名文)과 기개(氣槪)를 흠앙(欽仰)
하고 있었고 그의 자제(子弟)인 수찬(修撰)을 지낸 권전(權塡) 등의 현양(賢良)과 출신 사림(士林)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권수찬은 정몽주(鄭夢周)의 문묘(文廟) 배향(配享)을 주창(主唱)하여 성공시키기는 했으나 끝내 무옥(誣獄)으로 희생(犧牲)당한 것을 몹씨 애석하게 여겼다.

이처럼 권화산과 수찬 부자(父子)분의 피화를[4] 안타깝게 여기고 있던 터인지라
자기 고을 예안에 유배되어 살고 있는 권질(權礩)은 화산의 맏아들이자 수찬 권전(權磌)의 백씨(伯氏)이기 때문에 가끔씩 찾아가 뵙게 되었다.

그 어느날 “경호! 이사람 자넨 연전에 상처하고 난 뒤 속현(續絃)을 했는가? 장가
야지. 내딸을 맡아주게…….> 이렇게 단도직입(單刀直入)적으로 말을 하게 된 것이다.

혼미한 딸을 맡아 달라는 권질의 부탁에 퇴계는 한동안 말을 잃고 한참 생각을 하더니
“예! 고맙습니다. 제가 아내로 맞이 하겠습니다” 그러나 자친(慈親)이 계시므로 이 사실을 아뢰어 승낙(承諾)을 받은 뒤에 곧 예를 갖추어 혼인식(婚姻式)을 올리도록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퇴계는 어머니의 승낙 하에 30세 때인 경인(庚寅)년에 권씨 부인을 아내로 맞이함에 권질의 사위가 되었다.

※ 참고[註]


1) 속현(續絃) : 상처한 뒤 재혼 하는일. 재취, 삼취를 말함.
2) 권씨부인에 장가든 일 : 가일문중에 전해오는 이야기[권

   오근씨의 말과 권오봉 박사의 「예던길」 참조]

3) 김인후(金麟厚) 

   1510~1560[명종15] 조선 인종 때의 명신.

   자는 후지(厚之), 호 하서(河西) 본관 울산(蔚山)

   김안국(金安國)의 제자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讚) 역임.

4) 피화(被禍) 

   연산군 갑자사화(甲子士禍)때 권주(權柱)사사.

   무오(戊午)사화 때는 권전(權磌) 처형.

5. 시사단(試士壇)


시사단은 서원의 맞은편 강건너 섬마을 입구에 있었다. 이곳이 안동댐으로 수몰지역에 속하므로 안전하게 그 위치를 보존하기 위하여 1973년 정부에서 높이 10m의 석축을 쌓아 시사단을 그위로 이건하였다.

이곳은 정조16년(1792)에 정조(正祖)께서 규장각 각신(閣臣) 이만수(李晩秀)
를 도산서원에 보내어 과거를 보였던 자리다. 우리 나라 역사상 지방에서 과거를 보인 곳은 도산뿐으로 매우 유서깊은 곳이다.

정조 임금께서는 선생[퇴계]을 추모하고 가상(嘉賞)하는 뜻에서 친히 제문을
지어 측신을 보내 서원 사당[尙德祠]에 제사(祭祀)를 올렸다. 그리고 영남일대의 선비를 장려(獎勵)하고 등용(登用)코자 과시(科試)를 보이도록 명하였다.

각신 이만수가 어명(御命)을 받고 도산서원에 도착해 지형을 살펴보니 장소가 협소하여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없으므로 택한 것이 바로 서원건너 질펀한 송림(松林) 사이와 강변을 시험장으로 결정한 것이다.

서원(書院)에는 왕의 제문으로 제사(祭祀)올리는 식전(式典)을 할 때 7,228명의 선비가 참석하여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엄숙히 지냈다. 그리고 강변에 설치된 시험장에서 과거(科擧)를 보이니 답안지를 제출한 사람은 3,632명이었다,

시험지는 한양으로 상봉하여 왕이 친히 급제 2명, 진사2명, 초시 7명을 뽑아 각기 시상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비를 세우고 단을 모아 <시사단>이라 하는데 비문은
영의정(領議政)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지었다.

陶水洋洋 其上壇也 壇有階級 水有淵源 登壇臨水
觸類而伸 先正之化 聖主之恩

도산물 양양히 흘러 그위에 단이로다 단에는 계급이 있고 물엔 연원이 있나니 단에 오르고 물에 임함에 류(類)를 따라 뜻펴니 선생의 덕화요 임금의 은혜로다

[樊巖 蔡濟恭]

서원에서는 지금도 이 정신을 이어 받고자 도산백일장을 매년 열고 있다.

여기에서 장원으로 뽑히면 어사화를 쓰고 조롱말을 타고 안동민속축제 행사장으로 와서 식전 마당을 한바뀌 돈다.


[參考事項]

 

도산서원은 1969년 정부에서 정화보수(淨化補修) 공사를 실시하면서 토석(石)담을 <사고석> 담장으로 하고 지붕의 기와는 내림막사를 사용했으며 단청(丹靑)은 <금모로> 단청으로 바꾸었다. 따라서 <옥진각>이란 유물전시관(遺物展示館)을 현대식 철근 콘크리트[외형은 한식 내부는 현대식]로 새로 지었다. 이 모두는 문화재 원형(原形)변경(變更)에 관계없이 박대통령(朴大統令)의 특지(特指)에 따른 것이다.

 

 


* 이미 잘 아시는 곳이지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자료로는

  안동서가협. 조선일보 대구지사 신사임당아카데미 답사사진, 유구님자료등을 사용했습니다.

  더 자세한 자료 있으신 회원님들 첨삭해 주시고 답사에 많은 참여 있으시기 바랍니다.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예원(霓苑)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