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톱
바닷물이 밀려나기 싫어서
잡고 사정할 게 없는 모fot벌만 갈퀴질하다
이내 손을 놓고
저만치 물러가 한숨 놓고 쉬는 저녁 한때
저 부드러운 물살, 모래톱에 상처 났겠다
푸른 피 철철 흘리면서
황혼의 해여울 속에 실컷 부서져 버렸겠다
바닷물은 세상의 톱날 시퍼렇게 갈아
이빨 뽑으려고 당당히 쳐들어오겠지만
톱질에 몸 부대끼다 또
얼마나 쓰린 상처 덧날까, 피 흘릴까
모래톱은 그러나 날을 세우지 않는다
오래된 사랑 아름답게 기억할 뿐
바다, 저도 푸른 몸을 눕혔다 일으켰다
건강한 해를 깨우고 잠재운다
거기서 관용의 아침이 날마다 태어나고
나날의 마음들 한 물로 깊어진다.
풍경은 바람을 만나면 소리가 난다
고요한 무욕의 밤이 밝고 참 맑다
이 세상 비워낸 바람 한 점
풍경 속으로 가볍게 몸 밀어 넣자
어깨를 툭 부딪치곤
슬픈 청상의 절개가 흔들리더니
무심을 깨우려는 듯 쨍그랑 쨍그랑……
저 눈부신 해탈의 풍경 소리가
산의 뿌리까지 흔들어 씻어 낸다
바람을 만나니 산이, 마음이
소리만 남아서 흔들린다
절정의 손을 풀자
뜨끔, 어둠이 깨지는 수줍은 농월
이 산사
풍경도 바람을 만나면 소리가 난다.
지리산 봄이 손 까불어서
지리산 봄이 왔다 가라 손 까불어서
그 손잡고 갈까 망설이다
나, 마음 앞세워 서둘러 갔네
시끄러운 귓소리 몇 차례 헹구고 나서
실상사 문고리 잡고 흔들어 댔더니
봄이 문 열고 나와 안고 들어가데
그러더니, 부처님 실눈 속에 폭 들어앉아
나를 빤히 내다보고 알았다는 듯
허상은 벗어 놓고 실상만 가져가라 하데
그 소리 너무 울려 지리산 천지
시냇물 부서져선 송곳처럼 온몸 찌르데
그래, 아픈 살 뚝뚝 떼어 공양했더니
무섭게 뼈만 남아 겨우 물러왔네
이제 지리산 봄이 왔다 가라 손 까불면
실상은 훔쳐가고 허상만 남겨 놓은 누구 있데
거기 누구 있데, 하고
동네방네 떠벌이고 흉보고 다닐라네.
다비의 불꽃
스님 한 분, 불꽃이 되어 하늘로 갑니다
온몸 그 무엇이 소금이 되어
저리 무겁지만
뜨거운 장작불 짊어지고
가슴을 환하게 밝힙니다
그러자 별들이 담쑥 안고 가
겨울 눈 밥이 되고
여름 비 국이 되어
세상은 통통 살이 찝니다, 그래
잿더미를 뒤적거리자 여전히
스님 한 분
빙그레 웃고 계십니다.
봄, 흘레붙다
들에, 산에 가면 봄 햇살이
푸릇푸릇 암내를 풍기고 다닌다
너에게서 나까지 벌겋게 물이 올라서
밤꽃 비린내 얄궂어라
아래에서 위로 솟는 물은 문제가 있다
온갖 잡새들 아랫도리 까발리고
그 황홀한 신음을
봄 강물에 흥건히 풀어 놓는다
저 새,
그걸 못 견디고 삐쭉거리다
온몸 일시에 무너져선 입도 삐뚤어졌나
봄은 변명이다
저 산이 달겨들어 흘레붙었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한바탕 시원스럽게 울어 버린다.
명상하면 산을 안다
조용한 새벽, 길 찾아와
산 하나 짊어지고 명상한다
숲이 무슨 수로 산을 껴안고 놓아주지 않는지
숲이 어떻게 초록의 깃털로 산을 품고 사는지
단단한 목질을 콕콕 쪼아대는
나무좀의 시디 신 이빨 가는 소리에
개미의 당당한 발자국 소리에
환하게 깨어난 이슬
처음으로 입술을 포갰을 때
풀잎, 첫 경험이라 얼마나 놀라는지
그런 부끄럼을 우리 사람들이 실컷 훔쳐가도록
눈 못 뜨게 가려놓고 이슬, 저는 왜
초롱초롱한 눈 가리는지
세상 구경 다 끝낸 나는
산 하나 내려놓고 명상한다.
깃털 하나
어린 새의 깃털 하나 빠져 있군요
산이 그걸 짊어지고 끙끙 앓다가
무겁다고 투정하네요
사색이 되어서,
새 소리마저 무겁다 싶었는지
밖으로 모두 밀쳐내 보내고
산도 제 몸무게를 견디지 못해
다리 몇 개 뻗대고 누워 버리는군요
무슨 뻐꾸기 새끼 심술인지
산은 나마저 밀쳐내 버리고는
그제사 안심이 되어
지상의 둥지를 혼자 차지하고
참 조용히 철들고 있네요.
작은 집 한 채
늙으면 갈 곳 있으리
만나는 사람도 큰 집도 줄이고 줄여
혼자이면 어떠리
아내와 둘이면 사치스런 꿈일까
키 낮은 처마, 단간 방 앞에
찻상 하나 놓고 마주앉을 의자 둘
두 평 꽃밭이면 어떠리
그런 집에 살면 다시 사람들 그리워져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리
늙으면 그렇게 살아야 하리
낯선 외로움 서서히 익히면서
외로움끼리 모이면 금빛이 되리
그런 세상 하나쯤 가져야 하리.
6. 나의 시, 나의 변명
나는 다작多作의 시인도 과작寡作의 시인도 아니다. 시가 태동하면 그 동안에 축적되어 있던 체험과 이미지들이 한꺼번에 수십 편씩 줄줄이 쏟아져 나온다. 시는 새벽 산행의 명상에서 나온 산물이다. 시가 떠오르면 머리 속에 담아 오거나 어둠 속에 서서 또는 가로등 불빛 아래 쪼그리고 앉아 메모했다가 집에 오는 즉시 컴퓨터에 올려 가필과 삭제를 거듭하는 동안 한 편의 시가 된다. 그럴 때에 후배 시인과 만나면 농지거리로 “나 건드리지 마. 시 나온다.”고 하여 한바탕 웃는다. 그러한 후배 시인들은 이 말이 재미있었던지 때때로 만나기만 하면 인사말 대신 이 말을 먼저 되짚어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진다. “나 건드리지 마. 시 나오니까”라고. 시를 죄다 비우고 나면 영혼의 마른 바닥만 드러난다. 다음 시가 넘쳐날 때까지 나는 몇 달, 몇 년을 기다려야 한다. 1990년부터 10년의 공백을 가진 때도 있었다. 2002년에 낸 두 권의 시집 『풍경은 바람을 만나면 소리가 난다』와 『그 땅에는 길이 있다』는 그 동안의 침묵을 깨고 2000~2001년까지 2년에 걸쳐 쏟아져 나온 160편의 시를 묶어낸 시집이다. 시가 나오기 시작하여 이렇게 오랫동안 많은 시를 쓴 것은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다. 전에는 시집 한 권 분량도 채우지 못하고 시상이 메말랐으니까. 10년의 공백이 결코 공백이 아니었던 것이다. 시상詩想이 바닥을 쳐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아무리 기를 써도 안 된다. 누가 쥐어박고 윽박질러도 못 쓰는 고질이 나의 시 창작 습관이고 생리이다.
나는 시가 미의식의 표현이라는 말보다는 존재의 본질 인식이며 그에 대한 미적 언어 형태라는 말로 대신하고 싶다. 존재란 곧 ‘사물이 있음.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나는 ‘외계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 또는 ‘우주 현상의 본질적 실재’를 미적 감각과 시 정신으로 탐구해 보자는 미의식의 본질 곧 언어예술이 나의 시이다.
나는 요즈음 세계내世界內 실존으로서 시를 어떻게 써야 한다거나 시가 어떻게 생겨야 한다는 목적과 이념을 생각하고 쓰지 않는다. 다만 나와 대상이 존재의 수평적 필연성과 영적인 수직 관계로 시 정신의 핵에 전류처럼 번쩍, 하고 어떤 충격파를 일으켜 내 마음을 온전히 지배했을 때에, 그것은 마치 화학 반응을 일으키듯 언어와 의식이 하나의 동일성으로 융합되어 고양된 긴장의 미적 언어로 탈바꿈한 시가 되어 나온다. 그렇다고 존재의 명암이나 역사의 전개와 굴절에 의한 인간적 갈등 혹은 사회적 모순에 무관심한 것도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강렬한 색채를 띤 비판 대상으로 인식하기도 하지만, 시 정신의 근본 틀은 존재의 본질 파악이나 삶의 궁극에 접근하려는 몸짓에 있다. 그 하나, 하나의 몸짓이 나의 시인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필생의 업으로 삼고 있는 언어 작업이란 것을 ―존재의 표현이든 미의식의 표현이든― 다른 측면에서 규명한다면 서정적 본질을 객관적으로 형상화한 존재의 실체라고 말해야 좋을 것이다.
시란 것은 언어로 재생된 존재의 실재인 이상 그 어떤 형태의 글보다도 서정적 자아의 자유로운 정신과 명징明澄한 자의식의 발현이고 미적 본질의 해석인 것이며 포괄적, 총체적, 궁극적인 자아 투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나와 사물과 삶과의 은밀한 소통을 존재 의미의 본질 면에서 통찰한 다음 마침내 집중된 영혼의 언어로 표상表象하는데 진력한다. 그것이 오늘의 내 시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한 나의 시는 명상을 통해 구체화된 존재의 다른 모습으로 독자들을 찾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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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한국 대표 시인의 육필시집 시리즈
수작 43종
手作 시인이 손으로 썼다.
秀作 빼어난 작품을 골랐다.
酬酌 시인과 독자가 시심을 주고받으며 공유한다.
-지식을만드는지식-
한국 대표 시인의 육필시집 시리즈 ‘수작’ 출간기념
‘수작’ 출간을 기념하여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는 정기적으로 시인과의 만남 행사를 진행합
니다. 얼마 전, 반디앤루니스 코엑스점 쉼터에서 황학주 시인의 첫 행사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이 행사는 읽는 문학이 아닌 듣는 문학, 보는 문학, 느끼는 문학을 소개하자는 취지로 시작되었습니다. 낭송을 통해 책을 읽는 것 이상의 깊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는 정기적으로 이러한 낭송회를 진행할 예정이며 전주에서는 5월 7일 목요일 고사동에 자리 잡고 있는 교보문고 전주점(063-288-3700) 지하 1층 ‘이음’에서 1960년대 한국시단의 대표적인 시인 이운룡 선생님의 행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새로운 시의 시대를 연다
지식의 보물창고인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현재 353권 출간)을 간행하고 있는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는 ‘한국 대표시인의 육필시집’ 시리즈인 ‘수작’ 43종을 선보입니다.
‘수작’에는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인이 손으로 썼다는 ‘手作’이라는 의미,
두 번째는 빼어난 작품을 골랐다는 ‘秀作’이라는 의미,
세 번째는 시인과 독자가 시심을 주고받으며 공유한다는 ‘酬酌’이라는 의미입니다.
‘수작’시리즈는 현재 한국 시단의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 시인들이 자기들의 대표시를 손수 골라 펜으로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눌러 쓴 시집들입니다. 그 가운데는 이미 작고하셔서 유필이 된 김춘수, 김영태, 정공채, 박명용 시인의 시집도 있습니다.
시인들조차 대부분이 원고를 컴퓨터로 작성하고 있는 현실에서 시인들의 글씨를 통해 시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시인들의 영혼이 담긴 글씨에서 시를 쓰는 과정에서의 시인의 고뇌, 땀과 노력을 더 또렷하게 느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수작’ 시리즈는 생활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시를 다시 생활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에서 기획된 것입니다. 시가 어렵고 고상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쉽고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것으로 느끼게 함으로써 “시의 시대는 갔다”는 비관론을 떨치고 새로운 ‘시의 시대’를 열고자 하는 것이 ‘수작’ 시리즈의 목표입니다.
시인이 나에게 펜으로 직접 써준 시
시인이 책상서랍에서 종이를 한 장 꺼냅니다. 앞에 놓여있는 필통에서 펜 하나를 잡았다. 그리고는 그 종이 위에 한 편의 시를 적어내려 갑니다. 그 시를 나에게 직접 건네줍니다. 이것이 육필시 ‘수작’입니다.
‘수작’은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43인이 참여합니다.
그 시인들이 지금까지 쓴 자신의 시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시들을 골라 A4용지에 손으로 직접 썼습니다. 말하자면 시인의 시선집인 셈입니다. 어떤 시인은 만년필로, 어떤 시인은 볼펜으로, 어떤 시인은 붓으로, 또 어떤 시인은 연필로 썼습니다. 시에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습니다.
시인들의 글씨는 그야말로 천차만별입니다. 사람이 생김새가 다르듯 글씨도 그렇게 다릅니다. 또박또박한 글씨, 삐뚤빼뚤한 글씨, 기러기가 날아가듯 흘린 글씨, 동글동글한 글씨, 길쭉길쭉한 글씨, 깨알 같은 글씨... 온갖 글씨들이 다 있습니다. 그 글씨에는 멋있고 잘 쓴 글씨, 못나고 보기 싫은 글씨라는 구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인이 영혼으로 써내려간 시를 위한 글씨만 존재합니다.
‘수작’은 43종은 총 2105편의 시가 수록됩니다. 이를 평균내면 한 시인 당 50여 편씩의 시를 선정한 셈이 됩니다. 시인들은 육필시집을 출간하는 소회를 책머리에 역시 육필로 적었습니다. 육필시집을 마치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하는 시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수작’은 시인이 쓴 육필을 최대한 살린다는 것을 디자인 콘셉트로 삼았습니다. 책의 판형은 시인이 글씨를 쓴 종이 크기와 비슷합니다. 틀리게 쓴 글씨를 고친 흔적도 그대로 두었습니다. 글씨 크기도 최대한 시인이 쓴 대로 하고 임의로 조정하지 않았습니다. 간혹 알아보기 힘든 글씨들이 있는데, 독자들이 이를 찾아볼 수 있도록 맞은 편 페이지에 활자를 함께 넣어주었습니다. 제본도 육필의 느낌에 어울리도록 책 등에 꿰맨 실이 그대로 보이게 했습니다.
‘수작’ 43종은 이운룡, 황학주, 강은교, 나태주, 이정록 등 5인 시인의 시집을 1차로(필두로) 한 달에 3종씩 지속적으로 출간됩니다. 출간과 동시에 낭송회와 사인회를 함께 진행하여 독자를 직접 찾아갑니다. 이 행사가 우리에게 시가 다시 살아나는 계기가 되어주기를 희망합니다.
‘수작’ 시리즈 목록
1 정현종 환합니다
2 문충성 마지막 눈이 내릴 때
3 이성부 우리 앞이 모두 길이다
4 박명용 하향성 (고인)
5 이운룡 새벽의 하산 (출간)
6 민 영 해가
7 신경림 목계장터
8 김형영 무엇을 보려고
9 이생진 기다림
10 김춘수 꽃 (고인)
11 강은교 봄 무사 (출간)
12 문병란 법성포 여자
13 김영태 정처 (고인)
14 정공채 배 처음 띄우는 날 (고인)
15 정진규 淸洌集
16 송수권 초록의 감옥
17 나태주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출간)
18 황학주 카지아도 정거장 (출간)
19 장경린 간접 프리킥
20 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
21 고재종 방죽가에서 느릿느릿
22 이동순 쇠기러기의 깃털
23 고진하 굴뚝의 정신
24 김 철 청노새 우는 언덕
25 백무산 그대 없이 저녁은 오고
26 윤후명 먼지 같은 사랑
27 이기철 별까지는 가야 한다
28 오탁번 밥 냄새
29 박제천 도깨비가 그리운 날
30 이하석 부서진 활주로
31 마광수 나는 찢어진 것을 보면 흥분한다
32 김준태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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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오봉옥 나를 던지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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