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당선작(2)

[스크랩] [2012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귀화(歸化), 혹은 흑두루미의 귀환(歸還)/ 정영희

영관님 詩 2012. 1. 4. 20:22

 

[2012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귀화(歸化), 혹은 흑두루미의 귀환(歸還)/ 정영희

 

 

아무르 강 소인이 찍힌 항공우편이 도착했다

우표 네 귀마다 고드름이 박혀있는 흑갈색 편지에는

온난화 현상도 이곳에선 세계대백과사전에서나 읽어보는 호사라며

한낮에도 발가락을 날개 안쪽 깊이 파묻고 지낸다는 이야기였다



순천만에서 담근 농게 장을 벽돌 빵에 치즈대신

발라먹고 끼니를 때운다는 이야기며

새끼들로 인한 궁기窮氣때문에 늦은 저녁까지 시베리아 벌판에서

발품을 팔고 돌아온다는 행간에는 한숨이 진하게 배어났다



철새라고 부르는 비아냥 때문에 눈자위 진물이 마를 날이 없다는

대목에서는 먹빛 하늘을 갈기처럼 찢고 싶었다

허기로 눈밭에 시리도록 발자국을 남기는 일이 이젠 지쳐

순천만의 텃새로 귀화를 결심하고 있다는 추신에 이르러서는

철 이른 폭설이 자작나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갯가 짱뚱어의 눈알이 봉분처럼 튀어나온 이유를 알겠다

망둥어는 왜가리 공습을 기어코 막겠다며 전망대까지 벌써 올라와 있었고

칠게들은 뻘 구멍 속에 흑두루미의 식량을 비축하느라

열 발톱이 문드러질 정도였다



흑두루미의 귀환 아닌 귀화를 위해 탄탄한 움집이라도 예비해야 한다며

풍속을 온몸으로 가늠하고 있는 갈대의 심지도 깊었다

너울은 먼 바다에서 싱싱한 먹잇감을 데리고 오느라

하루에도 몇 번씩 지그재그로 물길을 오르내렸다



냉기가 옷깃을 쓸며가자 사람들이 탐조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깃털 스쳐가듯 달이 구름을 밀어 올리자

쿠르르, 쿠르르, 카아오, 카아오!

회색 부리를 비틀며 북쪽 하늘에 까만 점들이 펄럭거렸다

이백 스물여덟마리 대가족의 귀환 아닌, 귀화였다

 

 

 

  당선소감-아궁이에 지핀 온기 나누고 싶어

 

따뜻한 아랫목이 그리워지는 날, 서걱거리는 갈대밭에 앉아 철새들의 비밀을 문구멍으로 염탐한다.
첫눈을 기다리며, 철새들의 몸짓이 함박눈이라면 갈대들도 일어나 바람의 숨결에 맞춰 함박눈을 불러 모으겠지. 그러면 철새들은 구름의 모서리를 찢으며 묵정밭에 내려앉아 추위를 쪼아대거나 덧난 생채기를 검불로 덮어줄 게야. 냉기일지라도 달무리처럼 힘껏 돌려 쥐불로 윗목까지 데워놓는다면 올 혹한은 봄물처럼 흘러가겠지. 그러니까 어디 있던 친구야, 바쁘다만 하지 말고 순천만에 가보게나. 함박눈이 불꽃처럼 흩날리는 날에는.
설렘이 녹아 흐르는 첫눈 같은 시를 써야겠다. 밤새 뒤척거리다 날을 꼬박 새더라도 고비 사막에 첫눈만 내린다면 온 누리가 환하게 따뜻해지는 그런 시 말이다.
생의 춘곤증도 같이 깔끔하게 걷어내는, 그 땐 폭설이 서 너 달 쌓여 무등(無等)에 내가 고립되어도 좋으리. 그래도 줄 게 있다면 철새들의 간식거리나 골목길 연탄재로나 서 있고 싶은데, 얼지 않고 견뎌낼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참, 또 한 번의 비상을 위해 발가락을 깊이 꺾는 흑두루미의 마법을 터득해야 하리.
아궁이에 지핀 온기를 두 심사위원님들과 함께 나눠가져야겠다.
기회를 놓친 분들께도 위로의 함박눈 한 잔 건네고 싶다. 가족, 교직원, 친구, 화요회원들에게 감사의 삼보일배를 올린다.

▲1957년 순천 출생, 필명 정도전 ▲광주교육대, 한국교원대 대학원 ▲여천초교 교장

 

 

  심사평-철학적인 시세계 한폭의 그림 같아

 

예심을 거쳐 올라온 시를 읽었다. 문단에서 시 분야가 침체되어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출품작의 수에 비해 시의 수준이 높지 않았다. 실험정신이 살아 있는 시도, 삶을 치열하게 노래한 시도 드물었다. 이슈가 될 만한 시의 흐름도 눈에 띄지 않았고 전반적으로 시의 완성도도 낮았다. 세상을 들었다 놓을 절창을 만나고 싶은 기대를 안타깝게 접을 수밖에 없었다.
정도전의 ‘귀화(歸化), 혹은 흑두루미의 귀환(歸還)’과 권시은의 ‘프리다 칼로가 익어가는 팔월’을 놓고 고심한 끝에 정도전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권시은의 작품들이 완성도는 더 높았으나, 정도전의 시가 보여준 세계를 바라보는 깊이와 ‘철 이른 폭설이 자작나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와 같은 수일한 이미지에 표를 던졌다. 정도전의 시는 다소 설명적 이여서, 행간에 이미지의 증폭이 없어 시의 맛이 반감되고 있다는 단점도 지적되었음을 밝힌다.
위의 두 명의 시 외에 선자들의 관심을 끓었던 작품에는,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황재운의 ‘운주사’와 치밀한 묘사가 돋보인 천선필의 ‘자화상’이 있었다.

당선자도 낙선자도 모두 분기하여 우리 문학사를 빛낼 시인이 되길 바란다.

곽재구 시인 함민복 시인

출처 : 시인의 형님
글쓴이 : 시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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