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링거 속의 바다 / 김영란
온 몸이 글썽거린다 아득한 바다냄새
어쩌면 이 신열은 오래 전의 길 하나 열어줄지도 몰라
세상은 바다가 낳은 미지근한 비망록일거라고
아니, 그 비망록이 낙서들의 끝에 부려놓은 삽화일거라고
네가 나른한 힘을 얘기했던 곳으로
지금 나는 가고 있는지도 몰라
내가 너의 힘을 빌려 나에게 이르지 못할 때마다
변명처럼 꺼내든 바다가 아닌
방금 전 내 몸의 한 모퉁이로 들어오던
링거액 같은 바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잠깐의 외출로
조회할 수 있는 너를 믿지 않지
너의 웃음이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날들 속에서
조난의 느낌 하나만으로
바람을 이끌고 오고 폭풍을 이끌고 와
끝내 범선 같은 고백을 숨겼던 것처럼
나 지금도 먼 옛날의 너를 믿지 않아
기억이란 몇 방울의 망각으로 걸어나갔던
오랜 신열의 발자국들
어디선가 때 이른 저뭄이 다가와
내 옆구리를 툭 친 것도
네가 나로부터 멀어지던 형식이었음을 기억하는 한 순간
내 통증의 한 쪽에서 고개를 드는 현실 하나
나는 잠시 링거액 건너편에 기대어 놓았던 목발을 챙겨
너의 바다가 보일 것 같은 창가로 절룩절룩 걸음을 옮긴다
[당선소감-치열한 삶의 일부가 시로 흘러
기억의 모퉁이를 돌고 있는 쪽배하나, 포구로 튕겨져나간 조각들, 내 몸 속에서 떠다니며 글썽거리는 흔적들. 이 모두는 긴 겨울의 초입에서 거두지 못했던 시의 자리들이었다.
묵혀 놓았던 시들은 혼자 서러워했을까. 오랫동안 신열을 앓다가 만성이 된 구석진 자리의 염증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던 불혹을 넘긴 오후에 변명처럼 꺼내든 바다를 버려야 했다. 그리곤 병실에서 다시 바다를 꺼내야했다.
시대가 고통이었지만 어머니는 통증을 이겨내는 법을 터득하셨고, 아버지는 즐기는 법을 아셨다. 어쩌면 그 분들의 족적이 내게로 이어져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 켠에 깃든 통증이 치열한 삶의 일부가 되어 시로 흐르고 있는지도. 가만히 더듬어보면 내 속에 흐르는 몇 겁에 걸친 흔적과 기억들이 내가 기억되는 나보다 훨씬 거대한 것 같다.
봄이 멀리 돌아 앉아 있었지만 겨울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창으로 들어온 달빛 때문이었다. 달빛은 우주였고 친구였고 가족이자 스승이었다.
나의 인생을 빚어준 이케다 선생님, 시의 길을 포기하지 않게 해준 손택수 시인, 그리고 차령문학의 박경원 선생님, 온머리 송봉헌 선생님, 오래전 시의 길을 열어준 황금찬 선생님, 최두석 선생님, 문학세계와 영등포문인협회, 부족한 나의 곁에 있어준 현웅, 지원, 승민, 영미, 성남, 정한 모두에게 마음껏 감사하고 싶은 밤이다. 마지막으로 한라일보사에 감사드리며 심사위원님에게도 깊은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1970년 부산 출생 동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형식적 면에서 가장 숙련된 솜씨
|
작품보다 작품 속의 영혼이 먼저 들여다보여서 감상이 순조롭지 못한 경우가 있다. 예심을 거친 작품들은 선자로 하여금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토록 다른 4인 4색의 영혼과 그 시력(詩歷)은. 고심하며 읽은 작품은 최재우의 '간이역', 김현의 '겨울의 안쪽', 황경철의 '공포의 기록', 김영란의 '링거 속의 바다'였다.
'간이역'에서 최재우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노숙함으로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시골대합실", "소달구지", "보따리"와 같은 소재를 통해 드러나듯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정겹다. 그러나 그는 그리 길지 않은 시력의 한계 또한 노정시키고 있다. '간이역'에서의 돌연한 장면 전환이나, 그의 다른 시 '포구'에서 드러나는 이미지 분절 등은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김현의 '겨울의 안쪽'은 세밑에 꼬옥 끌어안고 싶은 시이다. 서사를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내는 능력은, 차고 낯설게 만연하는 시들과 차별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서사적일수록 정제된 호흡과 리듬감을 견지해야 하는 법, 몇 군데 군더더기가 눈에 띈다. 따뜻하지만 너무 잔잔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황경철의 시들은 미숙하고 거칠지만 패기가 있다. 다만 추상적인 대상을 추상적으로 풀어내는 일이 그에게는 힘에 부친 듯하다. 자폐적으로 분산된 이미지들이 제어되지 못한 채 범람하고 있다. 시가 아물 수 있도록 그의 상처가 더 깊어지기를 바란다. 깊어진 상처가 그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김영란의 '링거 속의 바다'는 형식적인 면에서 가장 숙련된 솜씨를 보여준다. 그러나 자신의 색채가 부족하고 소품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약점도 갖고 있다. 더구나 그의 시들은 작품들간의 격차가 드러나서 기우를 갖게 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기는 어려웠다. 모쪼록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열어나갔으면 한다. 숙련된 자의 출발점은 지금 다시 놓여져야 한다.
'신춘문예당선작(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2012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오영애-흰꽃이 지다/오영애 (0) | 2012.01.14 |
---|---|
[스크랩] [2012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위풍당당 분필氏/정경희 (0) | 2012.01.14 |
[스크랩] [2012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귀화(歸化), 혹은 흑두루미의 귀환(歸還)/ 정영희 (0) | 2012.01.04 |
[스크랩] [2012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노루귀가 피는 곳/최인숙 (0) | 2012.01.04 |
[스크랩] [2012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나비가 돌아오는 아침/허영둘 (0) | 2012.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