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시조

[스크랩] 추사(秋史)의 미공개 편지 발견 송나라 `용단승설차` 추정

영관님 詩 2010. 3. 29. 19:00

"700년 된 차(茶) 한덩이를 얻었다오… 기이한 보물이라오"

추사(秋史)의 미공개 편지 발견 송나라 '용단승설차' 추정

"북쪽에서 돌아오니 스님과는 가까워진 듯하나 여전히 천리(千里)의 거리가 있을 뿐이오. (중략) 그사이에 송나라 때 만든 소룡단(小龍團) 한 덩이를 얻었다오. 이는 기이한 보물이라오. 이처럼 볼만한 것이 한둘이 아닌데 와서 보고 싶지 않습니까."

1851년 7월 함경도 북청에 유배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 1856)가 이듬해 8월 해배(解配·유배에서 풀림)되어 돌아왔을 때 절친한 벗이었던 초의(草衣·1786~1866) 선사에게 보낸 편지다. 오랜만에 만나서 차 한잔 나누고 싶다는 애틋한 뜻을 표시한 일상적인 내용이지만 '송나라 때 만든 소룡단[宋製小龍團]'이라는 차를 얻었다는 대목은 흥미롭다. 송나라는 서기 960년 건국돼 1279년 멸망했으므로 600년 이상 묵은 차가 자기 손에 들어왔다고 말한 것이다. 이런 일이 정말 있었을까.

1852년의‘파신(坡辰)’, 즉 소동파의 생일인 12월 19일 초의선사에게 보낸 추사의 편지. 700년 묵은 송나라 때의‘용단승설차’를 얻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추사의 편지를 임서(臨書)한 전사본이다. / 정민 교수 제공
 

최근 한 개인이 소장한 필첩(筆帖)에서 추사의 이 간찰(簡札·편지)을 발견한 정민 한양대 교수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여러 문헌을 뒤졌다. 정 교수는 추사의 제자인 이상적(李尙迪·1803~1865)의 〈기용단승설(記龍團勝雪)〉과 황현(黃玹·1855~1910)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흥선대원군이 아버지 남연군 묘를 이장하면서 무너뜨린 고려시대 절 가야사의 석탑 속에서 700년 된 차(茶)가 발견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상적은 〈기용단승설〉에서 "근래 석파(石坡) 이공(李公·흥선대원군 이하응)께서 호서의 덕산현에 묏자리를 살피러 갔다가 고려시대 옛 탑에서 '용단승설' 4덩이를 얻었다. 근래 내가 그중 하나를 얻어 간직하였다"고 적었다. 가로·세로 2.35㎝, 두께 1.2㎝의 단차(團茶·덩이차) 형태로 표면에 용의 형상을 새기고, 옆면에 눈보다 희다는 뜻의 '승설(勝雪)'이라는 해서체 글씨가 찍힌 차였다. 이상적은 송나라 구양수의 〈귀전록(歸田錄)〉, 서긍의《고려도경》 등 문헌을 통해 이 차가 송나라 휘종 선화 2년(1120년) 송나라 정가간(鄭可簡)이 만들어 황제에게 바친 '용단승설차'라고 고증하고, 대각국사 의천 등 고려 승려들이 중국에서 어렵게 구해 부처님 전에 바치고 석탑 안에 봉안한 것으로 추정했다.

《매천야록》은 대원군이 '용단승설차'를 얻게 된 정황을 보다 자세히 서술한다. 원래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 묘를 이장하기 위해 명당을 찾던 대원군이 "(충청도) 덕산 가야산 동쪽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자리[二代天子之地]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 있던 가야사를 태워버리게 했는데, 무너뜨린 오층석탑에서 '용단승설차'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정민 교수는 "대원군이 직접 추사에게 이 차를 건넸는지, 대원군에게서 차를 받은 이상적이 추사에게 다시 건넸는지 모르지만, 700년 묵은 송나라의 '용단승설차'가 추사의 손에 들어온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茂林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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