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는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글씨로 빼곡 채워진 병풍을 세워놓고, 아버지와 숙부는 기꺼이 절을 해왔다. 제사 때마다 펼쳐지는 그것이 추사 글씨라고 누군가 말해주지도 않았고, 누군가 묻지도 않았다. 그 힘있는 행서 글씨는 마치 풍경처럼 거기 가끔 서서 나를 포함한 아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느 날 아버지는 달력 하나를 얻어 오셨는데, 거기엔 추사의 대련(對聯)들이 가득했다. 두 달마다 바뀌는 그것들을 바라보는 건 흡사 150년 전의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았다. 이번엔 뭐라고 쓰실까. 어떤 스무 살의 안진경체로 쓰실까, 서른 살의 옹방강체로 쓰실까, 마흔 살의 구양순체는 어떨까, 아니면 동기창, 혹은 예서를 지나 동방신기(東邦新奇)의 추사체로 쓰실까. 그 해가 끝난 뒤 이 감미로운 글자 풍경을 버리기 서운하여, 달력 중에서 두 장을 떼어내, 벽에다 붙였다. 이젠 집을 떠난지 오래 되었는데도 저 추사는 고향 벽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가끔 들러 저 글씨를 음미하는 일은 시골서 누리는 우연한 즐거움이다.
閒撫靑李來禽字(한무청리내금자)
宛在天池石壁圖(완재천지석벽도)
청리내금첩의 글자들을 한가로이 매만지고 있노라니
진짜 천지석벽도로다
청리내금첩은 당시에 글씨 교본처럼 들고다니던 서첩이리라. 추사의 다른 대련(對聯)을 보면 ‘청리내금첩/천지석벽도’ 이렇게 열 글자로 쓴 것도 있고, ‘난정병사첩(蘭亭丙舍帖)/천지석벽도’를 대비시킨 것도 있다. 난정병사첩이 왕희지의 글씨이니, 청리내금첩도 그의 작품일 수 있겠으나 자세히 알 수 없어 답답하다. 푸른 오얏나무에 새가 날아오네. 이런 제목이니 아름다운 풍경시일 듯 하다. 글자들을 매만진다는 건 베껴쓰고 있다는 얘기다. 글씨 하나로 한중일을 평정한 추사이지만, 그도 평소에 이렇게 열심히 임모(臨模)를 했다.
글씨를 베껴쓰는 마음은 조급해지기 쉽다. 저 왕희지를 넘어서기 위해 벼르는 생각이야 작지 않겠지만, 그래도 글씨는 한무(閒撫)가 필요하다. 고요함 속에서 벌이는 자기와의 싸움이다. 푸를 청(靑)자를 쓰고 오얏 리(李)를 쓰면, 마음에 푸른 나무 하나가 돋아난다. 올 래(來)자를 쓰고 새 금(禽)자를 쓰노라니, 그 오얏나무 가지 위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는다. 글자는 상상력의 실마리이지만 그 행간에는 완전하고 생생한 풍경이 들어있다. 시첩(詩帖)의 글씨들을 하나하나 베끼노라니 어느 새 시 속의 풍경이 그림처럼 눈 앞에 펼쳐져 있다. 그것이 ‘완재천지석벽도’의 경탄이다. 글씨를 쓰는 일은 타이포그래피의 형태적 매력과 글자들마다 지닌 의미가 만들어내는 상상의 마법이 어우러지는 일대 향연이다.
천지석벽도는 추사가 좋아하던 대치(大痴) 황공망의 그림이다. 천지는 백두산에 있는 연못과 같은 의미의 하늘못(天池)이다. 그 연못을 돌벼랑이 둘렀다. 생각만 해도 기이하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추사는 스스로 천지석벽도를 그리기도 했다. 얼마전 기사를 보니 이 그림이(기사는 天地石壁圖로 쓰고 있다. 대치의 그림과는 제목이 다른 걸까.) 수천 만원에 거래됐다고 한다. 시첩을 베껴쓰고 있는데 왜 갑자기 그림이 눈 앞에 펼쳐졌을까. 서화(書畵)은 동원(同源), 근본이 같기 때문이다.
저 대련을 보니 어떤가.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별로 없어보이는 무뚝뚝한 두 작품의 병치같아 보이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청리내금자와 천지석벽도 사이에는 아주 드라마틱한 반전의 고리가 숨어있다. 무(撫)는 마법사가 향로를 만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글자들을 어루만지니, 그림이 튀어나오는 마법이다. 청리내금은 풍경의 세밀화에 가깝다. 오얏나무 가지에 새 한 마리가 파득거리며 날아와 앉는 풍경. 미시적인 소묘이다. 그런데 그게 갑자기 천지석벽도로 변한다. 하늘못이 펼쳐지고 우람한 돌기둥이 솟아오른다.
글씨는 상상이 시작되는 실마리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림으로 바뀌면서 저토록 생생하고 웅장한 전경(全景)이 된다. 글씨와 그림의 현묘(玄妙)한 이음새를 추사는 저 청리내금자와 천지석벽도로 돋을새기고 있는 셈이다. 서화(書畵)에 대한 이런 입장은, 그가 평생을 통해 입증하고 실천한 예술철학이기도 하다. 나는 저 대련에서 두 글자가 특히 마음에 든다. 한무(閒撫). 한가로이 조물딱거리기. 모든 공부에는 이런 고요한 치열이 필요하다. 공부는 한무이며, 혼자서도 잘 노는 일이다. 또 하나, 한무하러 가자.
淺碧新瓷烹玉茗(천벽신자팽옥명)
硬黃佳帖寫銀鉤(경화가첩사은구)
파르스름한 새 차주전자에 차를 끓이고
누우런 노트에 시를 베껴쓰네
우린 스스로에게 틈만 나면 완물상지(玩物喪志)를 경고하지만, 그래도 애물(愛物)이 생기는 걸 어쩌겠는가. 드러난 것보다 내면이 중요하고 껍질이 아닌 본질에 의미를 두고자 하지만, 매사를 그렇게 툭 까놓으면 재미는 없다. 때로 무해한 허영도 필요하고 살짝이 객기도 필요하다. 차를 마시는 일을 좋아하는 것, 혹은 글씨 공부를 하고 시를 베껴 써보는 것. 나무랄 데 없이 고결한 취향이며 내공을 쌓는 일이지만, 그런 일들도 사소한 물건들이 멋과 기분을 돋우는 게 사실이다. 저 무렵의 옛 사람들은 무욕을 강조하면서도, 다구(茶具)들과 공책에는 욕심을 부렸던가 보다. 그게 내 입가에 따뜻한 웃음을 만들어준다.
빛깔이 참 곱다. 아주 파랗지 않고 파란 기운이 살짝 감도는 차 주전자와 찻잔. 그걸 새로 사와서 첫 차를 끓여보는 중이다. 찻잔에 걸맞게 가장 좋은 차를 골랐다. 차가 끓어오르는 장면을 그윽한 눈으로 음미하는 추사의 눈길이 나는 사랑스럽다. 게다가 아름다운 공책(佳帖)을 얻었다. 우리 또한 옛날펜이나 만년필로 일상적으로 글을 쓰던 시절, 노트 욕심이 얼마나 많았던가. 예쁜 노트를 보면 황홀해서 글씨를 쓰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던가. 노트에 시를 베껴쓰는 기분. 여기엔 연애감정처럼 깊이 있는 흥분이 있다.
이 대련을 보노라면, 추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느껴진다. 꿈꾸던 일을 이룬 행복한 한 때의 자기 모습. 평화롭고 고요한 자아 도취와 만족감. 천벽(淺碧)와 경황(硬黃)으로 대비되는 두 빛깔을 음미하는 그 시선도 감미롭고, 아끼는 차임에 틀림없을 옥명과 애지중지하는 시임에 틀림없을 은구를 비장의 무기처럼 꺼내고 있는 한 지식인의 무욕의 허영이 내겐 그림처럼 아름답다. 칙칙한 시골 벽에 붙은 멋진 두 개의 언어풍경. 방바닥에 누운 채 나는 벽 위에 드리운 추사와 논다. / 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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