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秋史)와 완당(阮堂)(2)
빈섬 이상국(秋史에 미치다 著者)
추사가 메인브랜드를 완당으로 바꾸는 것은 제주 유배 시절부터가 아닐까 한다. 완당이란 호를 지은 것은 완원을 만난 직후였지만, 그것을 자신의 ‘아이디’로 굳힌 것은 30년이 지나서인듯 하다. 물론 그 중간에 완당이라는 호칭을 쓰기도 했겠지만 그것은 다양한 멀티아이디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데 제주 시절에 그렸던 ‘세한도(歲寒圖)’는 그의 국제적 명성을 드높인 계기가 되었다. 제자인 이상적이 그 그림을 들고 연경에 들어가 청나라의 지식인 16명에게 제(題)와 찬(贊)을 받는다. 1845년 1월 20일의 일이다. 이 세한도의 관서에는 ‘완당(阮堂)’이라고 쓰고 있다. 제와 찬을 쓴 청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김추사선생으로 부르고 있지만 말이다. 세한도는 중국사람들에게 그를 추사가 아닌 완당으로 각인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제자 화가인 허유가 그린 ‘해천일립상(海天一笠像)’에도 완당선생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그림은 제주도에 유배 중인 스승을 위로하기 위해 추사가 좋아했던 ‘동파입극도’(소동파가 나막신 신은 그림, 송나라 이용면이 그렸다)를 살짝 바꿔 그린 그림이다.
추사는 유배에서 돌아온 뒤에는 완당노인, 혹은 노완(老阮) 등으로 자신을 표현하기도 한다. 말년에는 그것조차 무겁게 느껴졌는지, 그냥 과천노인이나 노과(老果), 청관산인(靑冠山人, 청계산과 관악산 사이에 사는 사람이란 뜻이다), 과칠십(果七十), 칠십일과(七十一果) 등으로 허허로운 분위기를 띤다.
추사와 완당 그리고 과천노인에 이르는 그의 호들은, 그의 삶과 꿈을 드러내는 비밀스러운 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추사는 어떤 의미로 지어진 것일까. 가을 추(秋)와 역사 사(史), 두 글자는 서로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우선 온도가 같다. 가을은 서늘하며 역사 또한 냉철하게 기술되어야 하는 글이다. 추상같은 엄격함이 그 두 글자에선 함께 배어나온다. 이런 점에서 등석여의 글씨를 보고 추사가 다시 쓴 ‘춘풍추수’의 뒷문장은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추수문장불염진(秋水文章不染塵). 역사를 기록한 글은 가을물과 같아서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
박제가는 이 뛰어난 귀족천재가 세상의 어리석음을 바로잡아주기를 원했을 것이다. 자신이 신분의 질곡에 묶여 감히 하지 못했던 것들까지도 이 제자는 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추사의 어린 시절 이름은 원춘(元春)이었다. 이 ‘봄의 첫날’을 ‘가을의 역사’로 보완한 셈이다. 봄날에서 가을로의 이동은 추사의 삶의 풍경을 그림같이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과천시 주암동 과지초당(瓜地草堂)
‘사야(史野)’라는 말은 ‘史’의 의미가 무엇인지 짐작케 한다. ‘사’는 잘 정리된 것이며 ‘야’는 자연 그대로의 것이다. 추사는 세상의 기준을 바꿨고 틀린 것들을 바로잡았다. 너무 ‘서늘한 가을’이었기에 시대와 세상은 그를 품지 못했다. 그가 불편했다. 그를 예찬하면서도 어딘가에 가둬놓아야만 안심을 했다. 예산에 있는 그의 집안 원찰(願刹)인 화암사에는 ‘추수루(秋水樓)’가 있고, 서울 통의동의 집 근처에는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迎秋門)’이 있다.
그의 글씨가 ‘추사체’로 통했던 것은, 그 호가 20대때 이미 국제적인 브랜드였기 때문일 것이다. 24세 때의 연경 체류는 ‘추사’ 김정희를 국제적으로 각인시키는 계기였을 것이다. 완당이라는 호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제주 유배 시절이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치고 추사 글씨 한점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왕까지도 나서서 글씨를 요구할 정도로 ‘추사 붐’이 일었다. 중국의 수집가와 학자들도 추사체 글씨를 얻고 싶어서 목을 쭉 빼서 조선을 바라보던 때였다. 그런데 추사가 중국과 조선의 고금(古今)을 넘나들며 전예해행을 섭렵하고 마침내 일가(一家)를 이루는 때는 그 무렵이었다. 스스로를 완당이라고 적극적으로 칭하기 시작한 그때, 추사체는 피어난다. 그러니 ‘완당체’로 부름직한데, 추사의 기억이 워낙 강렬했던 ‘팬’들이 그 글씨를 계속 추사체로 불렀던 듯 하다.
추사가 완당으로 바뀌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추사는 웃고 있을 때는 인자해보였지만, 틀린 것을 바로잡거나 논박을 펼칠 때는 가을 논바닥을 얼려버리는 무서리같아서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고 한다. ‘추사’라는 말에는 그런 기운이 들어있다. 그 사나움과 타협할 줄 모르는 엄격주의가 그를 제주도의 벼랑까지 오게 만들었다는 인식이, 그에게 없었을까. 완당은 중국 학자를 사모하는 의미를 담은지라 모화(慕華)의 기미가 있긴 하다. 사실 그의 중국 숭배는 평생을 관통하는 신념이었기에 ‘국가 주체성’이라는 지금 관점으로 매도하는 건 적절치 않을지도 모른다. 추사에서 완당으로 옮겨오는 그의 정체성은, 겸허와 부드러움이 아닐까. 완당은 어감도 동글동글하다. 역사라는 거대한 건물에서 ‘당(堂)’이라는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도 있다. 무엇보다도 삼십년전 스승 완원에게서 보았던 끝없는 공부의 열정을 다시 환기하는 의미가 크지 않았을까. 기본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듯 공부를 하자. 제주 시절 그가 책을 보내달라고 사람들을 붙잡고 얼마나 부탁을 많이 하던가? 바로 저 ‘완당 정신’이 그의 글씨와 학문과 관점을 난숙(爛熟)하게 하는 힘이 아니었을까.
제주에서 돌아온 뒤 추사는 ‘늙은 완당(老阮)’이 되었다. 64세 때 서울로 돌아왔지만 2년 뒤엔 다시 북청으로 내쫓긴다. 당시의 권력 쪽에서는 추사가 너무 유명해서 위험한 인물이었다. 노완 시절의 그는, 정치적 절망을 내면의 허허로움으로 이겨내고 있지 않았나 싶다. 그의 글씨는 이미 법식의 경계를 툭 틔워, 괴(怪)를 느끼게 할 만큼 자유롭고 질박하게 내달리고 있었다. 유학자로서 평생 동안 관심을 지녔던 불교의 경계 속으로 마침내 들어앉는 것도 이 무렵이다. 입으로 지어지는 온갖 변설들의 허망함을 깨닫고 유마거사처럼 입을 닫는 시절이다. 물론 뜻은 그렇지만 어찌 괴롭고 답답하지 않았으랴. 추사, 완당이라는 호의 무게조차도 버겁게 느껴졌던 그의 어깨에 내렸을 쓸쓸한 햇살을 상상해본다. 청계산과 관악산 자락에 숨은 이름없는 노인의 어깨 위에 '가을의 역사(秋史)'는 때마침 짙어가는 가을에 기울어간다. 1856년 10월10일 71세 추사 졸(卒)(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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