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10일 (일) 09:04 연합뉴스
<사람들> '書畵史家' 손환일 박사
|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최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주최 목간(木簡) 국제학술대회가 창원에서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 제가 토론자로 초청됐습니다. 어떤 역사연구자가 저에게 '서예를 하시는 분이 이런 자리에 나와서 역사를 운운하는 것이 지나치지 않습니까?'라고 하더군요. 어이가 없더군요."
남들은 서예가로 부르지만 그 자신은 한사코 서화사가(書畵史家)를 자처하는 손환일(孫煥一.53) 박사는 서양미술과 달리 동아시아 회화는 글씨와 분리될 수 없으며, 나아가 역사, 특히 문헌자료가 엉성한 까닭에 출토 문자자료에 대한 의존도가 특히 높은 고대사 연구자는 한문 외에도 글씨를 직접 쓸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동아시아 회화에서 글씨와 그림이 따로 구분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똑같은 붓으로 그림도 그리고 글씨도 썼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붓이 같기 때문에 그림이나 글씨의 필법(筆法)이 같습니다. 이것이 서양미술과 동양미술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 전통 회화사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글씨를 몰라 그것은 제껴두고 그림 구도가 어떻고, 준법이 어떻니 하면서 따집니다. 추사 김정희를 생각한다면 그림과 글씨를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하지 않습니까?"
손 박사의 진단에 의하면 동양미술사에서 그림과 글씨가 분리된 데는 서구미술사의 짙은 영향이 있다. 이 분야 대가로 통하는 국내 연구자 대부분이 미국이나 유럽과 같은 서구 유학파로 서예 전문가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의 진단이 썩 엇나갔다고 할 수는 없을 듯하다.
국내 역사학계, 특히 고대사학계에 대한 그의 비판은 신랄하다.
"당돌할 말 같지만, 고대사 연구자는 한문실력이 매우 뛰어나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글씨를 볼 줄 알아야 하고, 더 나아가 글씨, 특히 초서를 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문실력도 부족하고, 글씨라곤 써 본 적도 없고, 더 더구나 이 분야 전문가가 읽어주지 않으면 초서는 읽을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성급하게 다른 사람 판독이 틀렸니 맞니 왈가왈부하면서 멋대로 문서를 판독하는 모습을 보면 기가 찹니다."
같은 맥락에서 최근 역사학계에서 문헌자료와 금석문에 이어 제3의 사료로 각광받기 시작한 목간 또한 "나 같은 글씨 전문가가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분야가 아니라, 오히려 나 같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손을 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고 현재의 국내 서예학계가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다. 손 박사에 의하면 글쓰기 위주의 기능에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 자신은 피땀 나는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저 자신이 대가라는 말은 결코 아니며, 그럴 만한 수준 근처에도 가 있지 못합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지금까지 한문을 공부하고 글씨를 공부하며, 초서를 쓰고 있습니다. 기력이 다 할 때까지 이런 생활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런 노력이 기성 학계 연구자들에게는 부족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러면 그 자신은 어떤 서화 공부의 궤적을 밟았을까?
대전 출생으로 충남고 출신인 그는 97년 상명대 사학과 대학원에서 고려말-조선초 조맹부체 확산에 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고 2002년에는 모교인 단국대 사학과 대학원에서 신라-통일신라 금석문 서체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런 그에게 다소 이채로운 이력은 단국대 학부가 화공과였다는 점이다.
"저는 3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갔는데, 전공은 팽개치고 제 관심 분야 강의만 들었습니다. 미술사학자인 정영호 교수님 강의라든가 한문교육과 박천규 교수님 강의, 국문학과 황패강 선생님의 향가 강의는 3년 동안 줄곧 청강했습니다. 박천규 교수님이 그러시더군요. 정 그렇게 한문이 하고 싶거든 민추(민족문화추진회)에 가라고. 그래서 복학해서는 민추에서 1년 과정을 마치고, 다시 81년부터 85년까지 5년 동안은 청명(임창순) 선생이 운영하시는 태동고전연구소를 다녔습니다."
한문과 글씨에 미치다시피 하게 된 계기는 이미 충남고 재학시절에 발동했다고 한다. 애초에는 국악에 빠졌으나, 소리꾼만큼은 안 된다는 선친의 반대 때문에 글씨로 관심을 돌렸다는 것이다.
"처음엔 글씨가 그렇게 좋을 줄 몰랐지요. 한번 빠지니까 헤어날 줄 모르겠더군요. 당시(고교 재학시절)에는 매주 일요일이면 금석문 탁본을 했습니다. 충남고 서예부를 제가 만들었어요. 청묵회(淸墨會)라는 대전지역 고교생 서예반이 있는데 현재까지 약 1천800명에 달하는 회원이 배출됐습니다. 73년에 창립됐는데 초대회장이 접니다. 당시 한문은 경북 상주 태생이신 육천 안붕원 선생께 배웠습니다. 연민 이가원 선생의 스승이시죠. 제가 한문공부하러 갈 때면 선생님(육천)은 콩 타작을 하시곤 했는데, 저는 콩 타작하면서 한문을 배웠습니다."
이런 그에게 청명(임창순)은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고백한다.
"제가 글씨 하겠다니까 선생님이 '돈이 안 된다'고 말리시더군요. 나아가 두 가지를 강조하시더군요. 첫째, 한문을 모르면 안 된다. 둘째, 글씨를 쓸 줄 알아야 한다. 특히 초서를 쓸 줄 알아야 한다. 이 두 가지를 터득하기 전에는 학위 논문도 못 쓰게 하셨지요. 이 때문에 상명대 석사과정은 선생님 몰래 해야 했습니다."
어엿한 직장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는 그의 현재 직함은 경기대 전통문화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대학 다니는 1남1녀를 뒷바라지 하기에는 연구교수 연봉으로는 턱도 없지요. 국가기관이나 문중에서 의뢰하는 초서 판독 같은 문서정리를 해서 먹고 사는데, 아시다시피 일만 고되지 경제적 보탬이 크지는 않습니다."
이런 그가 앞으로 총력을 쏟고자 하는 분야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삼국시대 이후 통일신라시대까지 금석문은 모두 재판독을 하고 싶습니다. 다시 생각해야 할 대목이 적지 않음에도 이상하게도 요즘은 이런 연구가 학계에서 실종돼 있다시피 합니다. 둘째는 서화사 연구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 회화는 글씨와 그림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두 부분을 접목한 연구를 하고자 합니다. 셋째는 목간입니다. 목간은 금석문과는 또 달라, 당시 사람들의 육필 원고입니다. 특히 한국고대목간은 일본고대목간의 원류를 밝히는 데 결정적인 자료입니다. 동아시아 서사(書寫)문화를 보면 이상하게도 고대로 올라갈 수록 밀접성이 훨씬 높습니다. 일본 고대 서사문화는 제가 한 번 제대로 해 볼까 합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三道軒정태수 원글보기
메모 :
'漢詩.시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다시쓰는 광화문(서울신문 칼럼) (0) | 2010.03.29 |
---|---|
[스크랩] 제7차 답사 안내(2007, 12, 7(금), 영천 은해사) (0) | 2010.03.29 |
[스크랩] 서예는 현대인 마음 다스리는 최고의 수양-웰빙 서예 보급 나선 서예가 정하건씨 (0) | 2010.03.29 |
[스크랩] 추사친필 6점 공개 (0) | 2010.03.29 |
[스크랩] 추사(秋史)와 완당(阮堂)(2) (0) | 2010.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