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소설

[스크랩] 서창에 걸린 세상풍경(4)

영관님 詩 2010. 11. 5. 18:23

                                     서창에 걸린 세상 풍경 (4)

                                                           정 호 경


  쌍방과실

 매일 해가 뜨고 매년 설날이 찾아와서 맛있는 떡국이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주는데, 요즘 어디로 가나 좀처럼 사람 같은 사람 만나기가 어려우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이번 설날에는 서울에 있는 딸과 손녀가 시골 풍경을 구경하고 싶다면서 차속에서 여덟 시간이나 허리를 비틀면서 그믐날 찾아왔다. 명절 풍경도 옛날 같지 않아 세상 따라 많이 변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웃 간에 주고받는 정은 아직 남아 있어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니 고마운 일이다.


 우리 가족은 설날 아침 순천 갈대밭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일이 생겨 못 가고, 여러 차례 가본 곳이기는 하지만 돌산이나 한 바퀴 돌며 바다 냄새나 좀 맡고 오자며 오후 늦게 출발했다. 대교를 건너 돌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벌써 향일암에 들렀다 나오는 승용차들이 밀려 줄을 서 있었다. 한겨울인데도 우리의 눈과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어 주는, 잎이 푸른 후박나무 가로수와 길가 군데군데 예쁘게 피어 있는, 빨간 동백꽃과 산다화(山茶花)가 우리를 손짓하여 불러들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향일암을 돌아 저녁놀을 보려고 서쪽 순환도로로 접어들었다. 내가 자주 들르는 바닷가 커피숍 ‘언덕에바람’에서 잠깐 쉬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인 군내리 삼거리를 막 지나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붕 뜨면서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잠시 후 깨어나 창백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나오는 나에게 젊은 부부 가해자 운전자는 거두절미하고 ‘쌍방과실’이란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아무리 세상이 서로 잡아먹기의 살벌한 전쟁터로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지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사람이 죽었다 살아났는데도 기껏 한다는 말이 이건가?”

 가해자 운전자는 남자가 아니라 젊은 여자였다. 나의 추측이기는 하지만, 그날은 설날이었으니 술을 마신 남편 대신 운전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초보자도 쉽게 돌아 나올 수 있는 한적한 삼거리에서 얌전히 직진하고 있는 앞차를 들이받는다는 것은 완전초보자의 운전미숙이거나 아니면 여자도 한두 잔의 음주가 있었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가는 추돌사고다.

 거기에다 결과로 나타난, 해괴망측한 ‘쌍방과실’이라는 교통법규에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멈춰 서 있는 차를 뒤에서 들이받는 경우 외는 모조리 “쌍방과실‘이라니 이건 유치원 아이들의 자동차 놀이란 말인가.

 사람이나 법이나 진실해야 한다. 내 차와 함께 박살이 난 젊은 부부 운전자의 양심은 어디 가서 찾아야 할 것이며,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쌍방과실’이라는 해괴망측한 이 ‘두루뭉실’ 교통법규는 또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즐거워야 할 설날에 남부끄럽고 가슴 아픈 이야기다.


  지금 나갑니다.

중국은 예로부터 과장이 심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가장 비근한 예를 든다면 단연코 이백(李白)의 시‘추포가(秋浦歌)’가 맨 앞장을 선다. 그 첫 구절에‘白髮三千丈’이란 표현이 보인다.‘흰 머리털이 삼천 발이나 길다.’고 했으니 그 과장된 표현이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과장은 다시 말해 허풍이라는 뜻이다. 이는 대륙성의 호방한 기질 탓이려니 하고 너그럽게 봐 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유순하고 온화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온 우리나라 사람들도 중국 사람들 못지않게 과장이 심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역시 중국에 인접해 살아온 그들 문화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흔히 듣는 우리나라의 예를 한두 개만 든다면‘말만한 처녀가 왜 이렇게 부끄럼도 없이…’라든가‘그 음식은 죽어도 못 먹겠다.’등이다.


 지금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과장이나 허풍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그에 가까운 중국인의‘배짱’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을 것 같아 여기 잠깐 소개한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중국집 하면 으레 자장면을 연상한다. 자장면은 아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음식으로 생일 때나 초등학교 운동회, 또는 졸업식 하는 날에 아이들에게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가장 첫 손가락에 꼽히는 일등요리다. 값이 싸고 맛이 있어서 평소에도 중국집은 노소를 막론하고 붐비지만, 이런 특별한 날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혜화동 로터리에 있는 중국집도 무척 붐비는 집이다. 옛날 그 근처에 직장이 있어서 접심 때에는 동료들과 자주 들른 곳이다. 그런데 갈 때마다 손님이 많아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시간이 급해 소리치면 지금 나간다고 말했는데도 한참을 더 기다리기도 했다. 이는 이들의 태생적 배짱이고 허풍이다. 하도 헛소리를 잘 하기에 하루는 어떤 답이 나오나 하고 한번 놀려 주려고 동료 몇 사람과 함께 그 집에 들어가 앉아서 주문하지도 않고 빨리 달라고 소리를 내질렀더니

“다 됐습니다. 지금 나갑니다.”했다.

 그 순간 우리가 폭소를 터뜨리고 있는 것을 본 주인아저씨가 우리의 짓궂은 장난인 것을 눈치 챘는지 가까이 오더니 오늘 자장면은 그냥 서비스할 테니 맛있게 먹고 가라고 했다. 자주 들러 잘 아는 사이여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놀렸다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웃는 얼굴로 공짜를 한 아름 선사했다. 허풍과 배짱 속의 그 도량과 상술이 험난한 세상을 버티고 살아온 중국인의 저력이었던가.


   에덴동산에서

 요즘은 목욕탕마다 이발관이 있으니 구태여 시내 이발관으로 찾아가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래서 나도 한 장소에서 두 가지 일을 보기 위해 가까운 집 근처 목욕탕으로 간다. 그런데, 아무리 목욕탕에 있는 이발관이라고 하지만, 얼굴을 서로 맞대고 있는 그 좁은 공간에서 모두들 발가벗고 앉아서 이발 차례를 기다리고 있으니 얼굴이 간지럽다. 목욕탕 안에서 보는 알몸과 이발소 안에서 보는 알몸은 그 모양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들 에덴동산에나 소풍 온 줄 알고 있는가. 아무 거리낌 없이 발가벗은 채 내 코앞을 활보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런, 불쾌한 풍경이 보기가 언짢아서 이발을 마친 다음 옷을 벗고 목욕탕으로 들어가는 순서에 따르고 있는데, 이런 절차는 계속 나 혼자만의 예절과 질서일 뿐이다.


“아저씨는 이런 모습을 어떻게 보세요?”

 바쁘게 가위질을 하고 있는 이발사에게 나는 이렇게 물었다.

“나도 처음에는 대하기가 좀 민망스러웠지만, 이젠 눈에 익어서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혹시 본인의 아버지나 나이 먹은 동생이 여기 이런 모습으로 앞에 앉아 있다면요?”

“글쎄요. 그렇기는 하지만 모두들 목욕탕으로 들어갈 것을 전제로 한, 당연한 몸차림으로 알고 있으니까요.”


 이런 몰염치와 무질서 속에서 인간의 문화는 변하고 발전하는 것이겠지만 그런 가운데 바로 우리 코앞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일쯤은 바로 볼 줄 아는, 사람으로서의 눈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같은 건물 안의 목욕탕과 이발관과의 거리는 불과 몇 미터밖에는 안 되지만 그 놀이마당의 내용은 사뭇 다르기에 하는 말이다.

 남녀가 몸을 가리게 된 것은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부끄러움을 알게 된 데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지금 세상 돌아가는 꼴이 비단 이곳만의 이 이야기에서 끝날 일인가.‘적나라(赤裸裸)’라는 말은 아무것도 입지 않은 발가벗은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장소를 가릴 줄 모르는 몰염치한 알몸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가식 없는‘진실성’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안다.

 사람 사는 일이 이렇게 쉽고도 어렵다. 단 한 걸음의 차이에서 사람과 하등동물의 자리가 뒤바뀌어 얼굴을 못 드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보고 있지 않은가.

                                                                                             '휴먼메신저'  2009. 봄호

출처 : 김우종과 함께하는 문학세상
글쓴이 : 정호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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