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이라는 것
/ 金秉圭
카뮈는 <요나>라는 단편소설에서 우리에게 하나의 물음을 제출하고 있다. 한 사람의 화가가 경제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부러울 것이 없으며, 작품에서도 성공했지만 살아갈 희망을 잃고 끝내 넘어지고 만다. 화가가 남긴 캔버스에 조그만 글자가 쓰여져 있었는데, 그것은 '솔리테르'(고독한)로 읽어야 할지 '솔리데르'(연대의)라고 읽어야 할지 명확하지 않았다고 한다(프랑스 말 '테 t’와 '데 d'의 차이로, 뜻은 반대다).
우리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하여는 연대가 필요한지, 그렇지 않고 고독이 필요한지, 도대체 고독이나 연대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에겐 잘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평소에 서로서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그가 숨기고 있는 무엇을 어떤 기회에 발견하게 되면서 놀라는 수가 있다. 인간이란 각자가 개성을 가진 독자의 존재이므로 우리는 스스로의 '자기'를 깨닫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여느 '자기' 즉, 다른 사람들로부터 밀려 나왔다고 여기게 된다.
이러한 것은 무엇을 똑똑하게 보았다던가 깊이 생각한 사람에게 들어맞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이란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나오고 말았으며, 우리는 지금 가령 무엇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이젠 벌써 너무나 많은 일에 연관을 가지면서 살기 시작하고 만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고독한 존재이면서 그와 동시에 어떤 형태든 다른 사람과의 연대로부터도 자유롭지 않은 어떤 존재이다. 오히려 '고독'은 모든 사람들의 일상성에서 각자의 삶의 바닥에, 말하자면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고독이라는 것은 결코 공소한 사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문제로서 일상생활 안에서 반성해야 할 근원적으로 실존적인 물음의 제출인 것이다.
아마 고독을 여태까지 한번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인간의 실존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두세 살 난 어린아이도 자기 기분을 알아주지 않는다던가 무시되었을 때의 슬픔이나 괴로움을 잘 알고 있다. 누구나 직접 겪는 고독이란 다른 사람, 더욱이 그에게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 의사의 전달이나 교환이 되지 않고 따라서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는 일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 예컨대 적막감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랑을 받는다던가 소중하게 여겨진다는 것은 고독으로부터 해방되는 데 있어서는 2차적인 가치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의사의 전달이나 교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먼저 있고 다음에 사랑이 소중하게 여겨진다고 하는 것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알고 있듯이 다른 사람에게 의사의 전달이나 교환이 이루어져 따라서 이해되지도 않으면서 사랑을 받는다던가 소중히 다루어진다는 것은 되레 적막감을 더하게 할뿐이다.
그러므로 고독의 객관적인 형태는 의사의 전달도 교환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좀더 다듬어서 말하자면 커뮤니케이션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독에는 두 개의 층이 있는데 깊은 층은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없는 것이며 얕은 층은 사랑 받거나 소중히 여겨진다는 것으로 대표되는 정서적 반응의 교환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고독의 깊은 층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사랑 받는다던가 하는 것은 깊은 층이 있고 난 뒤의 2차적인 관심이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은 역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어떤 역할이든 그것을 연출하는 것이 기대되어 있는 사람은 연기자로서의 그와 '진실한' 그와의 사이에 다소간 간격을 느끼는 것이 보통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전자는 '내밀의 자아'인 것이다. 이 두 개의 자아는 역할과 자기와의 갈등으로 나타난다.
통렬한 전쟁 체험을 겪은 사람일수록 그 체험을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는 귀환 병사라는 역할과 '내밀의 자아'와 사이의 간격을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에게는 성서를 읽고있다는 것은 천진한 소냐에게 조차 겨우 털어놓은 자기의 비밀이었다. 그리스도교도라는 역할과 현실의 자기와의 사이에는 너무나 깊은 단절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수상록>의 몽테뉴는 고독을 좋아했다. 그가 말한 고독은 '육체와 정신의 평정을 방해하는 정렬에서 도피하여 자기의 기질에 가장 걸맞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며 좋은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몽테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들한테서 떨어져 본들 충분한 것이 안 된다. 또한 장소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우리들 자신의 안에 있는 모든 비속한 생활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곧 자기 자신을 격리하여 자기 자신을 되돌려 찾지 않으면 안 된다.'
혼자 있다던가 모두 함께 있다던가 하는 것만으로 고민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은 아직 모자라는 사람이다. 자기가 되며 자기에게 돌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커뮤니케이션의 결여 속에서는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없다. 고독의 깊은 층은 우리가 몸을 두고 있는 밖의 세계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 속의, 또한 자기 속의 세계가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2001)
수필가 김병규(金秉圭) 선생은
출처 : 50-70대의사랑과 추억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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