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과 시론

[스크랩] 진동규 시극 [자국눈]의 영상사업 가능성을 찾아/우한용 (서울대 교수)

영관님 詩 2011. 10. 12. 19:24

2011년10월03일 19시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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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동규 시극(詩劇) '자국눈'의 영상사업의 가능성을 찾아서
한국문협 문학관건립기금마련 시리즈⑥ 우한용 서울대 교수(소설가)의 평설을 중심으로

1. 시적 영상과 서사적 구조

우한용 서울대 교수(소설가, 사진)는 진동규 시인의 시나리오 <자국눈>의 영상화를 통해「백제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의 진실」을 규명하겠다는 의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시극 <자국눈>의 평설을 통해 영상사업의 가능성을 진단하고 있다. 

▲ 우한용 교수
시인이 시적 방법으로 극이나 시나리오를 쓰는 것은 매우 심각한 존재론적 의미연관을 지닌다. 진동규 시인이 30여 편에 이르는 시작품과 극작품을 하나의 작품집으로 묶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도도한 의욕과 도전일 터이나, 그만큼 모험을 동반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시인의 극작 작업에 대해 몇 가지 전제사항을 살펴 두고자 한다. 삼분법적 장르론은 언어표현의 인류적 보편성을 전제한다. 순간적 감성의 표출을 지향하는 서정, 사건의 인과적 연계를 구성하는 서사, 그리고 무대적 행위를 중심에 두는 극, 이 셋은 시대와 지역의 한계를 훨씬 벗어나 언제 어디서나 통용되는 문학의 원리다. 이른바 기본장르라는 것을 설정하고 문학예술의 분화에 따라 변종장르로 분화하는 구도를 설정하는 것이 프리드리히 헤겔의 고전적인 장르 본질론이다.

이 기본장르들이 시대와 지역의 영향을 받아 분화되면 변종장르가 된다. 우리가 현재 읽는 시니, 소설이니 하는 것은 근대 혹은 현대를 배경으로 분화된 변종장르이다. 극의 경우 또한 근대극 가운데 장막극을 변종장르의 대표격으로 예거한다. 이러한 변종장르에 속하는 것들은 공간(지역)과 시간(시대)의 영향을 반영하여 영국이나 프랑스의 근대소설, 독일의 근대극 하는 식으로 분화된 특성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시극'은 기본장르로서 시적 방법을 구사하는 극이라는 뜻이 된다. 현대에 창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현대극이 됨은 물론이다. 시는 언어적, 방법적 수단이고 극이 목적에 해당한다. 이는 모순된 명제이다.

기본장르 사이에는 넘나들기를 시도한다면 분리의 원칙이 한 작품 내에서 서로 곁고틀기 때문에 '통일'을 이루어낼 수 없게 된다. 시이면서 극이라면 이는 대서사 양식에 해당하는 장막극과 서정시의 통합을 시도하는 격이 된다. 이러한 모순된 일을 해내고자 하는 처절한 고투 가운데 하나가 '시극'을 시도하는 모험이다. 시와 소설의 장르 특성을 구분할 때, 소설이 전체성의 이념에 몰두 내지는 집착한다는 것은 지외르지 루카치 이래 일반화된 논리이다. 그러나 한 인간의 생애를 두고 본다면 시인의 경우도 소설의 전체성 이념에 무관하다고 하기 어렵다. 완결된 세계 형성에 대한 열망, 그것은 생애 전체를 마무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작품의 완결성과 생의 완결성은 구조적 동질성을 지니는 것으로 파악된다.

생애의 완결과 문학(시)의 완결은 이야기 형식(敍事形式, narrative structure)을 필요로 한다. 서사를 전개하는 문학적 방법은, 앞의 설명을 따른다면, 두 가지를 상정할 수 있다. 하나는 서사시를 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막극을 만드는 것이다. 이 둘을 합쳐 거대서사(巨大敍事, gross Epik)라 하여 서사의 원형으로 상정한다. 시인이 거대서사로서 극을 지향할 때 서사시의 길과 극의 길이 완결성이라는 하나의 귀일점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현대적 상황에서 작업을 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둘은 서정시, 현대적 의미의 서정시에서 본다면, 둘 다 막다른 골목에 해당한다. 여기서 우리는 관점을 달리해야 할 필요를 절감한다. 시로 극을 도모하는 시인이, 시인 이상(李箱)의 표현대로 무서워하는 이와 무서운 이만 있는 막다른 골목을 벗어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2. 시적 인식과 극적 인식

이는 생의 주체인 시인이 작업하는 시의 본질과 연관되는 사항으로, 이른바 생의 형식과 관련되는 방법의 발굴이라는 문제를 둘러싼 논의로 치닫게 된다. 즉 시적 인식과 극적 형상화 방법이 만날 수 있는 길을 찾아나서는 일이 된다. 여러 갈래의 길이 있지만 대상의 인식이라는 점을 우선 고려하기로 한다. 대상 인식의 시적 방법 가운데 두드러진 특징으로 지적되는 것은 이미지 중심의 영상적 인식이다. 이미지는 일차적으로 시각적(視覺的) 이미지를 들어야 하리라. 대상 인식의 시각적 방법은 디테일에 있지 않고 형태(die Gestalt)에 있다. 이미지의 특성은 평면적 전체 형상으로 현현된다는 데에 있다. 실물 꽃 한 송이, 혹은 꽃 한 송이의 이미지는 꽃의 빛깔과 전체적인 모양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꽃술이라든지 꽃술에 붙은 꽃가루 같은 것은 이미지 뒤에 자세한 관찰에서 인위적으로(비영상적으로) 발견된다. 마찬가지로 극에서 인간은 전체적 인상으로 다가온다. 무대 위에서 연기를 벌이는 배우의 속눈썹까지 아름다운 형상을 드러내는 경우는 없다. 전체로서의 배우, 인물, 인간을 보게 된다.

시각적 인식 특성 가운데 하나는 평면적이라는 점이다. 시선이 가서 머무는 곳은 밖으로 개방된 평면 혹은 전면(前面)이다. 시선이 도달할 수 없는 후면과 내부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이 이미지로 현상하기 위해서는 기억에 축적된 이미지의 재생을 요한다. 이러한 점은 무대에서 배우들의 행동으로 드러나고 장면화되는 연극의 특성과 맞물린다. 배역이 주어진 배우의 행동에 대한 시각적 파악은 겉으로 드러나는 전체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배우의 행동은 시간과 함께 흘러가 버리기 때문에 세부 절목(節目)을 파악하기 어렵다. 본다는 것의 일면성은 사유의 깊이를 제한한다.

이러한 점은 시인의 시작詩作 방법과 맞아떨어진다. 사건을 전개하면서 디테일의 묘사보다는 전체 인상을 그리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과 극이 전개되는 방식은 상합하는 점이 크다. 소설가는 디테일의 묘사에 집중한다. 극적 인물이 굵직굵직한 행동선을 보여준다면 소설적 인물은 행동의 크기보다는 성격의 세밀한 묘사를 통해 살아난다. 시인이 극시를 지향하는 것은, 평범한 의미에서, 대작(大作)을 향한 의욕에 기인하기보다는 시작의 원리와 극작법의 원리가 공유하는 특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두 장르의 친연성이 시극을 도모하게 하는 근원적 에너지이다.

아울러 소재가 현재 시점에서 시간을 격한 경우, 시극의 의욕을 더욱 강하게 촉발한 수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인물과 사건은 물론 배경의 디테일이 마모되기 때문에 사건의 전체 얼개만 남는다. 고대 신화가 단순화된 이야기 형태로 남고, 신화의 인물과 사건의 형용방법 또한 추상적 설명이나 개괄적 서술로 일관하는 것은 이러한 때문이다. 14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점에서 펼쳐진 마동(薯童)과 선화공주(善花公主) 이야기를 언어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많은 부분의 디테일이 상상력으로 복원되어야 한다. 세부 절목(節目)의 상상적 복원은 처음부터 '전체'를 고려한 것일 수도 있고, 극적인 행동의 통일을 지향한 것일 수도 있다. 극적인 행동의 통일을 추구한다는 것은 완결된 세계를 향한 꿈꾸기를 상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할 때라야 시인 진동규의 작업을 검토할 근거가 마련되는 셈이다.

3. 모티프의 증식 방법

전래되는 설화를 모티프로 하여 근대적 의미의 극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야기 가닥을 조정하고 변형해야 하는 작업은 필수적이다. 시인 진동규의 극작품은 「서동요」를 중심 모티프로 하고 있다.「서동요」는 《삼국유사》 무왕 조에 기록되어 있고, 그 내용은 널리 알려져 있다. 널리 알려져 있다는 것은 일종의 원형(archetype)을 이룬다는 것, 많은 이들의 기억에 저장된 '이야기'라는 뜻이다.《삼국유사》무왕 조에 나오는 설화는 「서동요」의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서동요 설화는 이렇게 되어 있다.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가 홀로 서울 남쪽 못가[南池]에 집을 짓고 살면서 못 속의 용과 관계를 맺어 장을 낳았다. 어릴 때의 이름은 서동이며, 재주와 도량이 헤아리지 못할 정도였다. 항상 마(薯)를 캐다가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이로 인해 이름을 삼았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가 매우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신라 서울로 가서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면서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다. 이에 노래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 부르게 했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짝지어 두고

서동방(薯童房)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

동요는 서울에 가득 퍼져 궁궐에 알려지게 되었다.

<삼국유사>, 김원중 역, 을유문화사, p.213-4쪽

널리 알려진 내용이기 때문에 다른 설명을 더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서동이 신라로 들어가 위의 「서동요」를 지어 신라 장안에 퍼트렸고, 그것이 기화가 되어 선화공주와 인연이 맺어지고 선화공주와 백제로 돌아오는 과정에 '금' 이야기가 나오고, 지명법사의 신통력으로 금을 신라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미륵사 연기설화(緣起說話) 가운데도 지명법사가 신통력으로 절을 짓게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설화에서 지명법사의 이야기는 중요한 모티프가 된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런데 위의 이야기 가운데 서동과, 선화공주 등을 소재로 한 진동규의 시에서는 모티프가 약간 변형되어 있다. 이 모티프를 극작품의 주제가로 변형한 시작품 「자국눈」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모밀 언덕 위에 창을 내고 허공을 들이었네, 멎었던 눈이 먼 길을 돌아서, 먼 길을 돌고 돌아서 창가에 이르고 있었네 창백한 백제의 왕후께서 수정발을 젖히고 흰 눈송이를 맞이하고 있었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 놓고' 마둥이를 따라나선, 끝내 적국의 공주였네 바람에 맞추어 몸을 드러내면 물속에 달이 비치고 있었네, 달 속에 바람이 스치고 있었네 그 지독한 사랑의 향기 가람에 모셔야 했네. 고구려 땅에는 자명고가 있었다는데, 하늘에 울음 우는 북, 와서 미륵사 어둔 밤을 함께 찢어라. 지모밀 사람들 금막대기를 들고 나왔네,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던지고, 아낙네들 귀의 귀고리도 거울 속의 족집게도 다 들고 나왔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의 따님으로 사택적덕 좌평의 따님으로 창밖으로 나직나직 자국눈 날리고 있었네.

이 글에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만남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티프들도 함께 들어 있다. 서술자는 백제 왕후의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선화공주 이야기, 고구려 호동왕자와 자명고 이야기, 미륵사 이야기 등을 날아가면서 흩어지는 이미지처럼 동시에 펼쳐 보여준다. 작품 첫 부분에서는 모티프의 증식을 시도하면서 사리봉안기를 이끌어들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리봉안기는 무령왕릉의 금관, 금동대향로에 이어 백제의 문화 정수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사리봉안기를 작품에 이끌어 넣는 방법을 보기로 한다.

4. 사리봉안기와 사실의 재구성

사리봉안기는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여 조사하는 과정 에서 발견되었다. 사리봉안기는 이른바 사리장엄(舍利莊嚴) 가운데 사리를 봉안하는 연유를 적은 글을 일컫는다. 그 내용은 봉안하는 사리가 법왕의 것이라는 점, 백제 16관등 중 1품에 해당하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喜捨)해 가람(伽藍·미륵사)을 세우고 기해년(己亥年·639년)에 사리를 봉안했다는 것이다. 한문 원문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竊以法王出世隨機赴感 應物現身如水中月 是以託生王宮示滅雙樹 遺形八斛利益三千 遂使光曜五色行七遍 神通變化不可思議/我百濟王后佐平沙「積德女 種善因於曠劫 受勝報於今生撫育萬民 棟梁寶故能謹捨淨財 造立伽藍以己亥年正月卄九日 奉迎舍利/願使世世供養劫劫無盡 用此善根仰資 大王陛下年壽與山岳齊固/寶曆共天地同久上弘 正法下化蒼生又願王后 卽身心同水鏡照法界而恒明身若金剛等 虛空而不滅七世久遠 「蒙福利凡是有心俱成佛道

이 '사리봉안기'를 시인 진동규가 맥락을 잡아 번역한 것은 다음과 같다.

법왕께서 세상에 나오신 일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근기에 따라 부감하시고 응하여 몸을 드러내심은/ 물 속에 달이 어리는 것과 같았네// 왕궁에 태어나시고 쌍수 아래 입적을 보이심이라니/ 팔과의 사리를 남기시고 삼천대천세계를 이익되게 하는 것/ 그리하여 일어나는 오색 광요의 7번 요잡이라니/ 신통한 변화는 불가사의리라// 우리 백제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 광겁의 선인으로 하여 금생의 승보를 받으셨네/만민을 어루만져 길러 주시고/ 삼보의 동량이 되시어/ 공손히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셨네//

원하옵나니/ 우러르는 자량으로 이 선근으로/ 세세토록 하는 공양/ 영원히 다함이 없게 하소서// 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을 넓히고/ 아래로는 창생을 교화하게 하소서// 원하고 원하옵나니/ 성불 왕후의 수경과 같은 마음 함께/법계를 항상 밝게 비추시고/ 금강같은 몸은/ 허공에 나란히 불멸하소서// 칠세 구원토록/함께 복되고 이롭게 하고/ 모든 중생을 함께 불도 이루게 하소서//

간결한 가운데 종요로운 사항은 누락없이 기술되어 있는 명문이다. 가람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하는 내력을 적었는데, 이 항목이 이전의 미륵사 창건 설화를 번복하게 하는 점에서 역사의 한 획을 다시 긋는 역할을 한다. 이전의 기록에 따른 해석으로는 선덕여왕이 미륵사를 창건한 주인공으로 되어 있다. 지명법사가 신통력을 발휘해 가람을 지었다는 설화이기 때문에 가람조성의 발원자가 선화공주로 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사리봉안기'의 발견으로 미륵사 창건 발원자가 "우리 백제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이라는 사실이 확인되고, 이러한 사실의 확인은 사리봉안기 자체를 달리 읽게 한다.

사리봉안기의 첫 구절은 법왕法王의 생애를 고전적 모티프와 불교적 수사법으로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 법왕은 "근기에 따라 부감하시고 응하여 몸을 드러내심은/ 물 속에 달이 어리는 것과 같았네" 하여, 월인천강이나 불법보조의 이미지를 환기한다. 생애는 "왕궁에 태어나시고 쌍수 아래 입적을 보이심이라니/ 팔과의 사리를 남기시"었다고 되어 있다. 여기까지는 역사학자가 사리봉안기를 독해하는 독법과 차이가 없다.

그런데 '법왕'에 대한 작가의 상상력은 역사를 초월하는 쪽으로 치달린다. 사리봉안기의 법왕은 백제 무왕의 아버지 법왕(?∼600)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백제 법왕의 생애를 '백제금동대향로'에 그대로 조상(彫像)하여 명품을 완성했다고 맥락을 조정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학문적 검증의 대상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 영역이기 때문에 작품에 나타나는 리얼리티로 평가를 해야 하는 영역이다. 이는 다른 말로 시적 영역에 해당한다는 뜻이 된다. 시적 상상력은 역사적 상상력과 달리, 사실성과 인과성보다는 상상의 일관성과 이미지의 통일성이 더욱 중요한 요건으로 부각된다. 이러한 상상력이 서사와 만나 이야기의 줄거리를 구성하고 이야기 장면들은 강렬한 이미지로 부각하여 시극의 가능성을 추구하게 된다. 사실의 발견과 고증의 정확성을 생명으로 하는 것이 실증사학의 과업이라면, 문학에서는 이를 넘어서는 인간의 가능성을 발굴하는 것이 본령이다. 이러한 작업이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에 힘입는다는 점은 다시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5. 백제 금동대향로와 서사

백제의 사상과 세계관을 예술로 압축 승화한 것으로 평가되는 금동대향로의 발견은 백제 문화의 한층 높은 층위를 세상에 드러내게 했다. 그러나 역사적 서사와는 특별한 인연을 갖지 못한 채 문화재로 보존되고 연구가 진행되었다. 제작자와 제작 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어설픈 추측은 사실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에 학자들로서는 의당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렇게 신중을 기하는 가운데 해석의 폭이 협애(狹隘)해졌다. 백제의 산천과 거기 깃들여 사는 사람들의 생활과 그들의 꿈과 이상을 표상하는 봉황의 홰를 치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자태만 덩그렇게 남아 미지의 빛을 찬란하게 흩뿌리고 있었다. 서사가 없는 에피소드들의 분편들을 가지고는 어떤 세계도 형상화할 수 없다. 흩어진 삶의 조각들이 삶의 전체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조각으로 흩어진 백제인들의 삶에 시적 상상력으로 서사를 입히는 일은 총체성을 지향하는 작가의 몫이다.

금동대향로의 봉황을 법왕이 꿈에 본 것으로 설정하여, 금동대향로의 봉황상을 법왕의 행적과 상상력으로 연계하는 데서 금동대향로는 서사 맥락으로 편입된다. 이어서 법왕의 초례청 장면을 금동대향로의 같은 장면과 연관짓는다. 일반 백성이나 궁중이나 혼례의식은 일생의 대사 가운데 하나라서 해당 문화가 집약되는 지점이다. 이처럼 상징성이 높은 장면이기 때문에 금동대향로에 나오는 짐승들이, 이러한 잔치 장면에 등장한다고 해서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잔치에는 주인은 물론 지나가는 객이며 걸인 패거리까지 축하객으로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삶의 가닥이 아니던가. 달리 생각하면 동물들이 등장하는 것은 법왕이 내린 '금살령'에 대한 감응이거나 응답일 수도 있다. 금살령이란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의 고귀함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던가.

금동대향로에 부여한 서사는 다른 시적 이미지를 환기한 다. 영화의 시나리오로 구성된 시극에서는 영상으로 처리하기 좋은 이미지를 시로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동백꽃」이나 「나비는 꿈을 나누지 않는다」는 '합창' 등이 그러한 예이다. 숲과 초원과 폭포와 눈보라와 그런 자연의 이미지가 현란하게 출렁이는 가운데, 백제금동대향로의 서사는 거기 그려진 악기를 동원하는 '천제' 장면으로 전개된다. 시극의 천제에는 금동대향로의 짐승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리고 자연과 어울려 한판의 춤으로 어우러지는 제의를 구현한다. 그리고 자연에 귀의하는 일상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삶이 자연의 율려(律呂)에 얹혀 춤으로 어우러지는 모양을 「서동요」설화에까지 전이해 형상화한다. 인간과 자연의 어우러짐은 지극히 높은 종교적 이상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금동대향로의 행적을 전체 구조에 맞게 다시 조정한다. 금동대향로가 모셔져 있던 궁궐에 화재가 나고, 화마를 피하게 하려고 금동대향로를 부여로 옮긴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궁궐이 화마에 휩싸이고 나라가 깨어져도 금동대향로가 망가지는 일은 용납이 안 되는 것이다. 작품에서는, 그 화재 속에서 금동대향로와 사리봉안기가 하나의 서사 가운데 새로운 탄생을 맞는다. 법왕의 생애와 위업을 조상(彫像)한 금동대향로와 대가람을 창건하고 법왕의 사리를 봉안한 기록이 시적 상상력 속에서 하나의 웅대한 서사로 녹아나며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진동규 시인의 시극 「그림으로 쓴 백제 대서사시의 비밀」은 설화로 전해오는 「서동요」의 기본 이야기 골격과 역사적 기록이 발견됨으로써 미륵사의 연기설화를 고쳐 써야 하는 맥락에서, 맹렬한 시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이 두 서사를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한 것이다. 이처럼 웅대한 문화적 융합은 시적 발상과 서사적 상상력이 만나는 자리라야 가능한 작업이다.

6. 시적 인식과 서사의 결합

영화를 하나의 극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데는 많은 논의가 번져나갈 소지가 있다. 그러나 극의 개념을 다시 규정하고, 무대 개념을 넓혀 영화의 극적 잠재력(potentials)을 발굴하는 것은 미디어의 급속한 변화를 체험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과제이기도 하다. 그러면 왜 시극의 가능성을 영화와 연관짓는가 하는 문제가 따라 나온다. 무대에서는 갈등과 그 해결 과정을 행동으로 전개한다. 인간의 행동을 뒷받침해 주는 배경은 상징적으로 간결하게 처리된다. 배경의 사실성을 살리고자 하는 리얼리즘 극에서도 무대의 공간적 제약으로 인해 간결하게 처리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시적 상상력이 빚어내는 자연의 아름다운 이미 지나, 생명 탄생과 그 실현의 신비를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더구나 소재가 설화시대의 것일 경우, 당대 삶의 디테일을 무대에 올리고자 한다면 소득 없는 노력을 낭비하게 된다. 이러한 무대의 제약이 무대 위에서 인간의 강렬한 행동을 재현함으로써 인간의 심층을 투시하게 한다.

영화서사의 경우, 인물들의 행동으로 구성되는 플롯을 드러내기 좋을 뿐만 아니라 영상을 처리하는 데 대단한 장점을 지니고 있다. 현란한 색채영상을 자유자재로 처리할 수 있음은 물론, 인간의 시각적 한계를 넘어선 디테일까지 영상으로 처리할 수 있다. 시적 이미지가 뿜어내는 영상미는 영화와 같은 영상매체를 통하지 않고는 실감을 자아내기가 심히 어렵다. 시적 상상의 순수한 영상적 전환이 영화에서라야 가능하다는 점에서 서사 골격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시적 상상의 특징을 살릴 수 있는 영역이 영화라 함은 의문이 제기될 수 없다. 아울러 촬영기술의 발달은 생명의 탄생과 성장에 부수되는 섬세한 과정과 거기에 부수되는 각종 이미지를 그래픽으로 처리하여 영상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게 한다. 영화가 만들어져야 알겠지만 생명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교감은 찬연한 영상미로 구체화될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시극이 무대를 떠나 스크린에 오른다고 예술성이 떨어진 다든지 진지함이 덜하다든지 탓할 일은 아니다. 무대 위에 올리기 좋은 시극은 무대에서 소화하면 된다. 그러나 무대의 제약을 극복해야 하는 제재와 그러한 상상력을 빚어진 작품의 경우는 다른 매체를 이용하여 미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필요에 부응할 수 있도록 시적 상상력으로 발휘하고, 아울러 서사 골격을 새롭게 구성한 예로 진동규 시인의 작품 「그림으로 쓴 백제 대서사시의 비밀」은 시극과 영상매체의 결합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금석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출처 : 과학사랑모임


출처 : ♣전북펜♣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전북위원회
글쓴이 : Si용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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