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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1년 미당문학상 / 이영광

영관님 詩 2011. 11. 22. 20:05

[2011년 미당문학상 수상작]

 

 

 

저녁은 모든 희망을 / 이영광

 

 
바깥은 문제야 하지만
안이 더 문제야 보이지도 않아
병들지 않으면 낫지도 못해
그는 병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전력을 다해
가만히 멈춰 있기죠
그는 병들었다, 하지만
나는 왜 병이 좋은가
왜 나는 내 품 안에 안겨 있나
그는 버르적댄다
습관적으로 입을 벌린다
침이 흐른다
혁명이 필요하다 이 스물네 평에
냉혹하고 파격적인 무갈등의 하루가,
어떤 기적이 필요하다
물론 나에겐 죄가 있다
하지만 너무 오래 벌 받고 있지 않은가, 그는
묻는다 그것이 벌인 줄도 모르고
변혁에 대한 갈망으로 불탄다
새날이 와야 한다
나는 모든 자폭을 옹호한다
나는 재앙이 필요하다
나는 천재지변을 기다린다
나는 내가 필요하다
짧은 아침이 지나가고,
긴 오후가 기울고
죽일 듯이 저녁이 온다
빛을 다 썼는데도 빛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안 된다
저녁은 모든 희망을 치료해준다
그는 힘없이 낫는다
나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나는 무장봉기를 꿈꾸지 않는다
대홍수가 나지 않아도
메뚜기 떼가 새까맣게 하늘을
덮지 않아도 좋다
나는 안락하게 죽었다
나는 내가 좋다
그는 돼지머리처럼 흐뭇하게 웃는다
소주와, 꿈 없는 잠
소주와 꿈 없는 잠

 
《2011년 미당문학상 수상작》

 

 

 

[심사]

 

 

충만한 시적 에너지, 미당의 서정성에 김수영의 불온성(不穩性)까지

 
  올해 미당(未堂)문학상 본심에 올라온 시인 11명의 작품은 '지금, 여기' 한국시의 성취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미당문학상의 영예는 이들 시인들이 이미 나누어 가진 것이라 해도 좋겠다. 특히 중견 시인과 젊은 시인의 작품이 균형 있게 본심에 추천됐고, 시단의 허리라고 할 수 있는 40대 시인이 한국 시단을 떠받치고 있는 튼튼한 버팀목이라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본심에서 두어 명의 시인이 최종 후보로 거론되다가 이영광 시인을 수상자로 하는데 의견이 모아진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심사위원 모두 흔쾌히 수상자 선정에 동의할 수 있었던 것은 반갑고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영광 시인의 작품은 그간 이 시인의 시작 과정에서 절정의 감각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최근 한국시단에서 부족해 보이는 시적 에너지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구축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올해 발표된 모든 작품들이 상당히 시적 성취에 도달하고 있었으며, 수상작으로 선정된 '저녁은 모든 희망을'의 경우는 이 시인의 진정성과 언어의 힘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작금의 한국시단에서는 보기 드물게 발견되는 저항적인 면모와 자기 생의 무게가 그대로 실려 있는 묵직한 정직성은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나는 모든 자폭을 옹호한다' '나는 재앙이 필요하다'라는 불온한 혁명의 언어들과 '나는 무장봉기를 꿈꾸지 않는다' '나는 안락하게 죽었다' 라는 자기모멸 사이에서, 희망을 치료하는 저녁의 위로가 가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 매력적이다. 그리고 '나'와 '그', 일인칭과 삼인칭의 언어를 중첩시키면서 시적 주체의 자리를 복수로 만드는 것 역시 동시대의 화업에 부합한다.
 

  이영광의 시들에서 미당의 토착적인 서정성과 김수영의 불온성을 동시에 발견하게 되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그렇게 때문에 이영광 시인의 수상은 한국시단의 오래되고 동시에 급진적인 시적 가능성에 주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사 : 신경림, 황현산, 김승희, 최승호, 이광호(대표집필 이광호)

 

출처 : 발효되는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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