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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1년[문학과 의식] 신인상 처서외5편/김종애

영관님 詩 2011. 12. 18. 19:49

   처서

 

뒤꼍 알루미늄 문짝이 삐걱 열린다

영동선 어디쯤서 편승한 가을이 태백산을 넘다 동자꽃에 반했는지

추전역 톱니바퀴에 옷자락이 걸렸는지

일정을 자꾸 미루더니

불시에 도착한 처서의 발목이 성큼하다

기다림이 더딜수록 마남은 생경해지는 걸까

얼믕 숭숭한 팥빙수에도

밤낮없이 돌아가는 냉매들의 소음에도

젖은 모래알 같이 들러붙기만 하던 열대야를

비집고 들어온 바람 한줄기가

절기를 믿고 저지른 가을에의 예감이 맞긴 한 걸까

며칠 전 강화의 어느 흙집에서

묵밥에 조막걸리 한사발로 결별을 나누었던 여름

이젠 피라미의 흔인색ㄱ이 무지개 같던 냇가

그 비릿한 물 냄새와

부딪히면 불꽃이 일 것 같던 강변의 자갈들이

방금 잃어버린 듯 그리워지겠지

나뭇잎들은 기억을 정리할 궁리에 골몰 할 터이고

담장 밑 댑싸리 나무 통통한 대궁에 힘이 실리는 동안

먼 곳까지 나아깟던 내안의 배들도 귀항을 서두르겠지

죽부인이 혼자 나뒹구는 뭄간방에서

쿰쿰한 이불과 함께 소각시킨 담뱃대와

패브리즈향에 묻혀가던 아버지의 기억을 다독이며

뒤꼍문으로 숭숭들어오는 바람을

자꾸 단속하는 날이 오겠지

 

  가을,강

 

아직도 강물이 흐른다

그가 나를 다 빠져 나가지 못한 것일까

겨울새 한 마리

단정하게 개켜놓았던 그리움을 펼치고 날아가는 북쪽

그 긴 균열을 바라보다가

'퉁'

건드러지는 내 안의 공명들

그러고 보면 파문은 언제나

나에게서 시작되었던 망각의 뒷모습이었다

메시지를 알리는 신호음이나

문득 익숙한 체취와 부딪힐때

한걸음에 달겨드는 강 저편의 기억들

시간과 망각의 함수관계는

처음부터등호가 성립되지 않는 방정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강물은 흐른다

아무렇게나 내려온 달빛이 긴 문장이라도 엮어 내는 듯

강물이 얼룩지는 것을 지켜보는 늦가을

내게서 바져나가는 강물

그러나 여름은 또 올것 이고

더 깊은 심연의 그도 또 돌아 올 것이다

나는 그 깊은 안족

손잡을 곳 없이 매끄럽던 추락의 감촉과

 

그 안에 수장시킨 시간을 향해

길게 돌멩이를 던진다

 

 저녁

 

화장을 지운다

한낮의 만남을 지우고

하루치 내 안의 여자를 지운다

거울 앞에서 조용히 뒷걸음질 치는 내 안의 나

몇번이고 치켜 올렸던 속눈썹과

장밋빛을 훔치던 입술이 순해지는 순간을

오랫동안 들여다 본다

언제부터였을까

햇살의 무지개를 속이고

문신같은 기억들을 속이고

그 역광속의 나마져 속이고자 했던 아침이

내게서 시작되었던 그때가

노화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를

문밖에 기대어 내안을 엿듣는 조바심들을 모른체 하며

슬볏들여다 보던 거울 서랍속에 감추고

벽 속 스위치의 왼쪽을 눌러

어둠에 합류하는 저녁,

 

 

아버지의 건널목

 

주머니 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신호가 바끼길 기다렸다

넉 달채 체류 중인 아버지의 병세

누군가 골똘히 켜놓은 저 신호등처럼

아버지의 임종도 어느 길목에서 대기 중일 것이다

요 며칠 전화기 속에 살고 있는 올게

그녀의 목소리 너머로 공원의 은행잎이 흩날리는 걸 보며

내가 비우고 싶은 건

아버지의 삶일까 나의 불안일까

그러나 지금도 저 은행나무는 노랗게 쏟아놓은 유언대신

몇줌의 봄을 길어 올리고 있을 것이다

때론 알약 같은 바람을 흘려 넣으며

공백의 깊이로 더 비워진 제 속에서

흘러가 버린 추억 몇알 헤아릴 것이다

그러다 문득

아무리 킁킁 짚어봐도 밟히지 않는 뿌리의 계절을 떠올리며

알 수 없는 전율에 몸서리도 쳤을,

방문을 열자

이승의 몇가닥 호흡으로 초저녁 쪽에 건널목을 내던 아버지가

은행잎같은 아버지

노랗게 눕고 있다

 

   고양이

 

나는 온몸이 날개다

지금은 날지 못해도

퇴화된 날개가 살갚으로 숨어들어

온 몸의 털로 다시 태어난듯,

완벽한 착지로 완성되는 나의 낙하는

참으로 압권이다

나는 가끔 '나비'라고 불리운다

기척을 지우며 그림자의 무게조차비우는

나의 걸음걸이는

기실 두려움이며 염탐이다

두눈은 고아처럼 불안하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다

그래서 울타리 밖으로 내 던져진

또 다른 이름은 'ㄷㅎ듁'아더

낮에는  치하에 몸을 숨기고

밤이면 어둠의 계단을 오르는

'도둑'은 결코 발톱을 잊지 않는다

개소주집 가마솥에서

뼈와 살이 모두 해체된 뒤에도

나의 발톱은 야광처럼 죽지 않을 것이다

출처 : 도봉시벗
글쓴이 : 잎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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