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욱과의 내한성(耐寒性) 낙엽관목. 꽃은 홑·반겹 등으로 아주 여러 가지이고(127종), 꽃색깔도 흰색·분홍·빨강·보라 등 다양하며 무늬도 여러 가지로 화려한 꽃을 피운다. 꽃이 7월부터 10월까지 100여 일간 계속 피므로 무궁화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학명은 Hibiscus syriacus L.이다.
문헌 기록
한반도에 무궁화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산해경 山海經≫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은 기원전 8∼3세기 춘추전국시대에 저술된 지리서(地理書)라고 전하여 내려오는 문헌으로, 동진(東晉) 때 곽박(郭璞)이 그 때까지의 기록을 종합, 정리한 것이다. 이 책에 “군자의 나라에 훈화초가 있는데,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君子之國 有薰花草朝生暮死).”라는 기록이 있다.
군자국은 우리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며, 훈화초는 무궁화의 옛 이름이다. 이로 미루어 아주 예로부터 무궁화가 우리 나라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 효공왕이 문장가 최치원(崔致遠)에게 작성시켜 당나라에 보낸 국서(國書) 가운데 “근화향(槿花鄕:무궁화의 나라. 신라를 일컬음)은 겸양하고 자중하지만, 호시국(楛矢國)은 강폭함이 날로 더해간다.”고 한 것이 있다.
≪구당서 舊唐書≫ 199권 신라전(新羅傳) 737년(성덕왕 36) 기사에도 “신라가 보낸 국서에 그 나라를 일컬어 근화향, 곧 무궁화의 나라라고 하였다.”고 한 것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신라시대 이미 우리 나라를 근화향, 곧 무궁화의 나라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조선 세종 때 강희안(姜希顔)이 저술한 한국 최고의 화목에 관한 책인 ≪양화소록 養花小錄≫을 보면 “우리 나라에는 단군(檀君)이 개국할 때 무궁화[木槿花]가 비로소 나왔기 때문에 중국에서 우리 나라를 일컫되 반드시 ‘무궁화의 나라(槿域)’라 말하였으니, 무궁화는 예로부터 우리 나라의 가을를 장식하였음이 분명함을 알 수 있다.”라는 기록도 있다.
일본의 ≪왜기 倭記≫에는 “무궁화는 조선의 대표적 꽃으로서 무려 2,100여년 전 중국에서도 인정된 문헌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전국민으로부터 열광적 사랑을 받았으며, 문학적·의학적으로 진중한 대우를 받았다. 일본의 벚꽃, 영국의 장미와 같이 국화로 되어 있다가 조선조에 들어와 왕실화가 배꽃[梨花]으로 정해져 무궁화는 점차로 세력을 잃고 조선민족으로부터 소원해졌던 것이다. 20세기의 문명이 조선에 들어옴에 유지들은 민족사상의 고취와 국민정신의 통일진작에 노력하여, 붓과 말로 천자만홍의 모든 꽃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로되 무궁화는 여름과 가을에 걸쳐 3, 4개월을 연속해 핀다고 하여, 그 고결함과 위인적 자용(偉人的姿容)을 찬미하였다. 따라서, 무궁화강산 운운은 자존된 조선의 별칭인데……”라는 기록이 있어, 우리 민족과 무궁화의 관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1935년 10월 21일 ≪동아일보≫ 학예란에 ‘조선의 국화 무궁화의 내력’이라는 제목 아래 “아마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조선에도 개화풍이 불어오게 되고 서양인의 출입이 빈번해지자 당시의 선각자 윤치호(尹致昊) 등의 발의로 양악대를 비롯하여 애국가를 창작할 때 애국가의 뒤풀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구절이 들어가면서 무궁화는 조선의 국화가 되었다.
무궁화는 또한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탄압 대상이 됨으로써 민족의 상징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하게 얻었다. 일제는 무궁화를 ‘눈에 피꽃’이라 하여 보기만 해도 눈에 핏발이 선다거나, ‘부스럼꽃’이라 하여 손에 닿기만 해도 부스럼이 생긴다고 하는 등으로 무궁화를 폄훼하였던 것이다.
안창호(安昌浩) 등이 맹렬히 민족주의를 고취할 때 연단에 설 때마다, 가두에서 부르짖을 때마다 주먹으로 책상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무궁화동산을 절규함에, 여기에 자극을 받은 민중은 귀에 젖고 입에 익어서 무궁화를 인식하고 사랑하게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후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말은 우리 한민족의 가슴 속에 조국에 대한 영원한 사랑의 뜻으로 남게 되었다.
이에 맞서 남궁억(南宮檍) 선생 등이 무궁화의 가치 인식 및 무궁화 보급운동 등에 헌신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민족지였던 <동아일보>에서 10여 년 동안 무궁화 사진을 게재하는 등의 활동을 펼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무궁화가 어떻게 한국의 ‘나라꽃’이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애국가를 만들면서 후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구절을 들어감으로써 나라꽃이 되었다고 하지만 현재까지 무궁화를 국화로 규정한 법령은 없다.
대한민국이 수립된 직후인 1949년 10월 대통령 휘장과 행정·입법·사법 3부의 휘장을 모두 무궁화로 도안하여 제정·사용하게 했다. 1950년에는 태극기의 깃봉을 무궁화의 꽃봉오리로 제정해 사용함으로써 무궁화는 일종의 관습으로 ‘나라꽃’이 된 것이다.
무궁화의 날’은 무궁화가 가장 많이 피어있는 시기, 나라사랑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가장 높은 광복절 전후, 또 가급적 역사적 의미가 있는 날이나 국민들이 기억하기 쉬운 날을 선정한다는 기본 원칙에 따라 제정되었다. 8월은 무궁화가 가장 힘차게 피어나는 시기이고 숫자 8을 옆으로 눕히면 무한대 기호(∞)가 되는데 이는 ‘끝이 없다’는 ‘무궁(無窮)’과 의미가 같다는 점에서 8월8일이 ‘무궁화의 날’로 선정 선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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