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답 게 살 자
변미경
내 이름은 순돌이입니다. 나는 지금 따뜻한 햇볕 아래 엎드려 졸고 있습니다. 팔자가 늘어졌죠. 늘어진 개 팔자요 상팔자입니다. 가끔 가든 아저씨가 던져주는 돼지 뼈를 심심풀이로 개껌처럼 씹기도 합니다. 개 뼈 아닌게 다행입니다.
나는 내 밥그릇 주변에 흘린 밥을 주워 먹으러 오는 참새를 쫒기도 하는데 얘들만 보면 울화가 치밉니다. 내가 목줄에 매여 있다는 창피한 사실이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나 봅니다. 숫제 날아서 달아나지도 않고 ‘나 잡아 봐~라’ 약 올리듯 총총걸음으로 달아나니 말입니다. 목줄에 매달려서 주인에게 아부 잘 해 먹고 사는 짐승. 저 쥐새끼만도 못한 날짐승들이 나를 얼마나 경멸하고 있을지를 생각하면 화가 치밀죠.
도요새(cock)를 쫒는 개라 하여 코카 스패니얼이란 이름이 붙은 유래를 그 무식한 새 대가리들이 알 리가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조상이 영의정이었으면 뭘 하나요. 지금은 목줄에 매여 사는 개새끼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걸.
나는 유명 신발회사 모델로 발탁될 정도로 잘 생긴 견종입니다. 그래서 여기 오는 대부분의 어린이 손님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누립니다. 싸인도 해 주고 싶은데. 그들 중엔 음식 맛이나 분위기 이런 것과 상관없이 순전히 나 때문에 가든에 식사하러 오는 가족도 많답니다. 나는 인기스타처럼 우쭐해집니다. 내 인기가 이 정도라면 밥값 정도만 하는 개가 아니란 자부심이 들죠. 그런데도 목줄만 생각하면 슬퍼집니다.
요즘은 정말 경기가 안 좋은가 봅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오던 예슬이네도 기호네도 온 지가 두 달도 넘은 것 같고, 손님도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위태롭게 양변기에 올라 탄 자세가 아니라 두 다리를 쭉 뻗어 턱을 괴는 안정된 자세로 생각합니다. 사위가 고요하고 구름도 하늘에 멈춰 있습니다. 이럴 땐 정말이지 절로 옛 생각에 젖어 듭니다. 참새들이 다가와도 그저 흰자위만 굴릴 뿐입니다.
내가 ‘엄마네 집’으로 입양된 건 태어난 지 한 달 반쯤 후입니다. 아직은 젖을 떼기가 이른 시기였지만 둘째딸 성화에 못 이겨 서둘러 입양된 것입니다. 당시엔 우유에 불린 사료를 서너 개씩 먹고, 걸음마도 제대로 못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엄마네 식구들에게 측은지심, 보호본능 이런 것들을 쉽게 얻어 낼 수 있었습니다.
주로 나와 놀아주고 뒤처리를 해주는 사람은 작은딸, 목욕 시켜주는 사람은 ‘엄마’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귀에 물이 들어가면 병이 나기 때문에 갓난아기 목욕 시키듯 했습니다. 따뜻한 물에 향긋한 샴푸로 목욕하고 덜덜 떠는 나를 수건으로 꼭 싸서 안아 주었습니다. 아, 그때처럼 행복했던 순간은 없습니다.
나는 딸 둘인 이 집의 셋째입니다. 아니 셋째이고 싶었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입니다. 엄마가 지어 준 순돌이란 이름은 좀 촌스럽지만 ‘해피’나 ‘메리’처럼 적나라한 개이름이 아니어서 대체로 만족합니다. 잠자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나도 다른 식구들처럼 등을 바닥에 대고 벌러덩 누워서 잡니다. 산책길에서 만난 아줌마가 하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더욱 그렇게 닮아 갔습니다. 저를 보며 어쩜 그렇게 주인을 닮았냐고 했지요. 그건 사람 닮았다는 뜻도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는 내게 거울을 보여 주며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죠. 사실로 거울 속의 나 자신은 사람이 아니라 ‘개새끼’였습니다. 아무리 사람처럼 벌러덩 눠서 자도 내가 사람으로 진화될 가능성은 영 프로. 개꼬리 삼년 묻어도 황모(족제비털) 안 된다는 속담이 맞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떤 존재일까요? 엄마는 첨엔 내게 무척 엄했습니다. 길을 잘 들여야 한다면서 글쎄 베란다 한켠 박스에 허름한 옷 하나 깔아 준 것이 내 방. 낮에는 거실까지만 내 행동반경이 허용되었고 밤이면 베란다 쪽방으로 철수되고 감금조치. 가끔씩 작은딸이 나를 데리고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가 주었었지만 엄마 몰래 입니다.
모든 개가 다 그렇듯이 개는 물어뜯기가 공통된 특성이며 취미이기도 합니다. 딸들 방은 물어뜯고 싶은 인형들이 가득 차서 가장 유혹적인 방입니다. 유치가 빠지려고 간질거릴 때면 그야말로 안 물어뜯고는 못 살죠. 아빠의 노트북 가방 끈을 질근질근 씹는 맛도 일품. 적당한 질감에다 짭짜름한 손 냄새가 시나브로 내 인내심을 테스트합니다. 어느 날은 아빠의 손까지 조금 물었는데 당장 싸다구에 불똥이 튀었습니다. 그날부터 나와 이 집 어른들 사이에 심각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나는 케이지 안에 감금되기 시작했습니다. 죄명은 노란 배설물로 여기저기 영역표시 하는 것, 소파나 가방 등 비싼 가죽제품 물어뜯은 것, 노란 털 뭉치를 여기저기 흩날린 것 그리고 주인 손을 물어뜯은 전과범.
무더운 어느 여름날 하루 종일 감금 되어 있던 나는 슬슬 화풀이를 시작했습니다. 배변용으로 깔아 준 기저귀를 바락바락 찢기. 냄새나는 것들과 일회용 기저귀에서 나온 젤리 같은 알갱이들을 한 데 버무리고 그 위에 뒹굴기. 작은 딸이 준 정구공과 곰돌이 인형도 잘 반죽된 노란 액체를 골고루 묻혀 뒤죽박죽. 이게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개판’이죠. 그리고 어떤 때는 과감히 탈옥을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나를 가둔 케이지는 점점 높아져 갔습니다. 탈옥 범이 생기면 벽돌담도 높아져야겠지요. 그만큼 현실과 이상의 벽도 쌓여갔습니다. 그렇지만 ‘개판’이 되었을 때 비로소 즐거운 나는 언젠가 엄마가 보여준 거울 속의 그 강아지 본색을 그대로 드러낸 것입니다. 그렇게 넓은 잔디마당이 있는 집에서 ‘개판’을 만들고 아무데서나 뒹굴고 살고 싶은 걸 어찌합니까?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한다’고 하듯이 ‘개는 개답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개답게 사는 것이 부끄러운 것만은 아니죠. 그런데 자꾸 우리 보고 말하는 ’개판‘이란 무엇일까요?
TV 화면에서는 가끔 ‘개판’이 방영됩니다. 옥상에서 서로 싸우는데 쇠몽둥이, 화염병, 최루탄, 신나 뿌리기, 소방차, 기중기 그러다가 죽기도 합니다. ‘개싸움에는 모래가 제일이다’ ‘개싸움에 물 뿌리기’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개판이 아니고 ‘사람 판’입니다. 개들은 그렇게 미련한 싸움 안 해요. 죽이면서 싸우지 않습니다.
억울한 누명이 한두 가지인가요? 맛있는 개똥참외는 길바닥에서 자라지요. 그거 개들이 길바닥 아무데서나 배설한 똥에서 자란 참외 맞습니까? 내가 아는 개들은 참외 안 먹는데요? TV에서 보니까 사람들은 윗분에게 아부를 잘 하데요. 그거 모두 진심일까요? 그런데 왜 아부하던 사람들이 배신하죠? 나는 배신하지 않아요. 개들은 결코 사랑과 은혜를 배신하지 않아요.
말끝마다 개새끼라 욕하고 ‘사람답게 살자’고 말하는데 그 말 바꿔 보실 의향은 없습니까? ‘개답게 살자’라고. 그렇지만 여전히 목줄에 묶여 참새들한테까지 놀림이나 받는 주제에 이런 잘난 소리는 해서 뭣하겠습니까.
오늘 밤엔 달 쳐다보고 엄마 생각이나 해 봐야겠습니다. 나를 낳아 준 것도 젖 한번 물려 준 것도 없는 엄마지만 꿈속에서라도 엄마 품에 안겨 긴긴 밤 ‘순돌이 생애의 행복했던 순간’ 속편이나 감상하며 외로움을 달래 보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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