評說
중심꽃, 그 아름다운 블랙홀
이운룡
(시인․문학평론가․중부대 교수)
1.
윤현순의 옷자락에서는 향기로운 시와 꽃냄새가 풍긴다. 꽃과 함께 잠들었다가 꽃과 함께 눈뜨는 그에게선 또 하나 향기로 빚어낸 아름다운 시가 있기 때문이다. 꽃과 시는 항상 웃음을 열어 보이는 그의 얼굴에서도 환하게 피어난다. 그런데 사람들은 삶이 괴롭고 힘든 투쟁이며, 끝없이 고난을 극복해 가는 과정이라고들 말한다. 그것이 사람의 숙명이고 실존의 비극이라고도 말한다. 그나마 백년을 넘어 사는 사람도 드물다. 삶이란 실로 고해요, 영원한 시간과 순간이 싸우는 전쟁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숙명이다. 그러나 윤현순의 시와 꽃나라에 들어서면 전혀 고해도 안 보이고 전쟁이란 것도 무시된다. 중년에 이르기까지의 꽃과의 사랑, 시와의 입맞춤, 거기에 어떤 질시의 불화살이 날아오고 죄와 악의 보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프랑스 시문학사에서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보드렐은 ‘악의 꽃’을 노래했다. 악에서도 미를 발견한 시인이다. 그러나 윤현순은 ‘악의 미’라는 역설을 수용하기보다는 절대의 순수 자연미를 탐색하는데 생의 의미와 가치를 두고 사는 시인이다. 그리고 명실상부, 그것을 생활 속에 온전히 꽃피우고 산다. 무더기로 쌓여 있는 온갖 꽃들은 그에게 와서 다시 아름다운 시로 태어난다. 말 그대로 꽃천지 시천지이다.
그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부러운 시인이라고 말한다. 세속사회의 부와 명예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꽃과 시와 인생을 송두리째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윤현순이며 꽃집 경영주이다. 이름하여 꽃집 안주인, 여류시인, 말만 들어도 기분이 상쾌해진다. 그의 꽃방에 발을 들여놓으면 첩첩층층 온갖 꽃봉오리들이 가지가지 다른 얼굴과 색깔과 향기로 온몸과 마음을 덮쳐 온다. 그 황홀함이 지나쳐 약간은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날마다 화분을 관리하고, 화환이나 꽃바구니에 생글생글 예쁜 꽃들을 앉히다 보면, 어느덧 사람과 꽃이 구별되지 않는 시의 현실로 뒤섞이고 있음을 그 스스로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을 또 포장된 소형 트럭에 싣고 배달까지 하는 일상은 그 자체 생활이 곧 한 편의 서사시와 같다. 시의 꽃바구니, 그 여백을 적절히 살리되 주제를 강조한 색채미의 조화와 구성미를 세세히 살펴가면서 무아의 경지를 소요하는 은밀과 정일, 그 속에 푹 빠져 있는 선(禪)의 미(美)를 지켜보는 우리는 그 아름다운 형상을 한 순간도 놓쳐버릴 수가 없다. 그의 경건한 득도의 자세, 말없는 동작, 그리고 무아 무념의 정신을 집대성한 꽃의 완성미, 그것들은 언어를 대신한 시의 현실 참여라는 말이 아니고는 달리 이름 붙일 재간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밝고 깨끗한 생령들이 꽃무더기로 쌓여 있는 그 집에 들어가 눈을 크게 뜨고 휘휘 둘러보노라면 그의 시들도 송이송이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이다 일시에 함성을 지르면서 와락 덤벼들 것만 같다. 일명 <초롱꽃화원>,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꽃의 시인이다. 꽃이 꽃을 보고 웃는 그 청정과 천진과 순수무구를 마음 속에 담쑥 채우고 나서, 마침내 요동치는 미적 감흥을 견디다 못해 가슴을 터뜨리고 나온 언어 하나하나, 그것들이 곧 시의 꽃떨기이며 꽃들의 향기이고, 명도가 선연한 시의 지상적 총화가 아니겠는가.
2.
블랙홀이란 태양계의 소우주이건 무한대의 대우주이건 간에 우주 에너지의 총량을 흡수하는 핵의 구멍이다. 그리고 그 주변 에너지와 물질까지 모두 빨아들이고 있다는 과학지식은 이제 누구나 아는 상식이 되었다.
우주과학의 발달, 그 근원을 찾아보면 경험적 상상의 결과에 의해 공식화된 귀납추리에서 발견된다. 귀납추리의 주인공이 시인이다. 시인들의 영감에 의한 상상력이 과학자들의 지적인 모험에 접속되어 우주의 자연 법칙인 절대 진리를 발견하는 데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윤현순의 연작 장시인 ‘중심꽃’ 100편은 그 자신, 곧 시적 화자의 생과 삶에 있어서의 블랙홀, 또는 지상세계의 블랙홀, 우주의 블랙홀과 같은 중심꽃으로 자리잡으려 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중심꽃의 개념은 동양사상 중 ‘중용’의 미덕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하늘․땅․사람〔天地人〕중 하늘에 해당하는 우주 공간과 그 물리 법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덧붙여 설명하면, 영원 무궁한 시공간에 있어서 나 있는 자리가 이 세상의 으뜸이 되는 중심이고, 나 있는 때와 ‘나’라는 사람이 영원한 우주 속의 전존재의 중심일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처럼 윤현순의 중심사상은 곧 윤리와 도덕의 중간적 에너지요 삶에 있어서의 존재의 근원에 가 닿고 있다. 따라서 단순한 안목으로 평가할 수 있는 미의식을 넘어 깊은 사유의 세계로 향하는 근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의 ‘중심꽃’은 시의 주제를 함의하고 있는 제재이며 그 실체이기도 하다. 시의 주제상의 의미와 언어는 매우 명확하다. 그것은 간결한 문체로써 대개는 시의 끝부분에 농축되어 있다. 때문에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고 쉽게 가슴에 와 닿는다. 그러나 시어는 그 집의 꽃처럼 화려하지는 않다. 꽃꽂이의 여백과 단순성을 그대로 살려 빚어낸 감성의 표상이기 때문에 안정감과 명료성과 깨끗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족할 뿐이다. 윤현순은 실제로 꽃꽂이 연구가이다. 또한 객지를 낯설지 않게 누비고 다니는 회장(한국플라워디자인협회 온누리꽃예술회)이자 꽃꽂이 지도자이다. 그는 십수년 전 전주의 서신동에 정착해 꽃집을 지어놓고 꽃과 더불어 숨쉬고 대화하는 꽃들의 신부요 시인이다. 이 간략한 설명만 듣고도 윤현순과 꽃, 윤현순과 시적 감성이 얼마나 유착되어 있고 농밀하게 시와 꽃을 일색으로 조화시켜 ‘중심꽃’이라는 하나의 통일된 미의식을 형상화하고 있는지 이미 짐작했을 줄 안다. 좀더 주의깊게 읽은 독자라면, 그의 정서에 의해 걸러져 나오는 직관의 언어와 순미한 감각, 절제를 원칙으로 한 표상화, 적절한 배치, 그 함축미 등에 세심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의 시들의 짜임을 보면 대부분 간결한 구성미를 보여준다. 짧게 줄인 만큼 시상이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깜짝 놀라게 하는 시한 폭발성이 그 자신에 대한 질문 형식이나 단정적인 깨달음의 형식으로 압축되어 있다. 그러니까 시의 기능과 형식이 본래 짧은 것 속에 있다 할지라도 깜찍한 언어 감각, 놀랄 만한 폭발성, 명료한 주제의식 들이 그의 시 특징이라는 점을 일관되게 보여 주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의 시상과 언어는 순도와 밀도가 매우 높고 이미지가 투명하다. 그러나 언어 감각의 색채는 담백하다.
그는 여류시인 특유의 온화한 성격과 모성적 포용력을 무기로 하여 자연이 연출하는 위대한 생명력을 인간계로 빼돌린 다음, 그것들을 안식과 희망의 세계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의 이유를 주장하거나 설득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느낌과 언어로써 답할 뿐이다. 그것이 시인의 의무이고 임무로 알고 아무런 단서나 사족을 붙이지 않는다. 그 대신 언어의 투명성, 함축성, 그리고 소박하지만 때때로 놀랄 만한 시상의 갑작스런 발전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있다.
독자는 강조와 변화라는 시의 언어 습관을 통해서 그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메시지나 이야기 알맹이가 무엇인가를 꿰뚫어 보게 된다. 같은 무리의 군중 속에서도 중심 역할을 하는 인물이 있다. 일상의 사사건건에도 중요시되는 사건이 있다. 집단무의식을 통해 영험한 신통력을 얻고자 하는 까닭도 저울의 추와 같이 그 중심을 움직이는 힘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이나 인생, 또는 예술 장르에 있어서도 그 중심되는 사상이 무엇이냐고 하는 그 무엇의 본질에 관한 명제를 놓쳐서는 안 된다. 가령 시공간의 대자연이나 만물 만상을 주재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핵)이 있다고 한다면 그와 상대적인 주변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중심과 주변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이다. 속과 겉, 안과 밖의 양면적 속성이 미와 추의 공존 원리와도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이란 영원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집중된 생의 축약, 그 절대치를 가장 큰 삶의 보람으로 치부하고 살게 마련이다. 여기에 윤현순의 시와 ‘중심꽃’과의 동일성이 있고, 그 존재 의의와 의미와 원리가 내재되어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한 생애의 집약된 ‘중심꽃’을 월계관처럼 머리에 이고 영원한 진리의 길로 가려는 그 절정에 윤현순이라는 한 시대의 시인이 오롯이 앉아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중심꽃’의 내포와 상징은 또 다른 면에서도 발견된다. 생기와 활력이 넘치는 꽃꽂이의 정서생활과 그것의 시적 조형성이 어떻게 사람과 이 세상을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에 대한 사고 실험이 곧 그것이다. 여기서의 사고 실험이란 시적 화자의 철학적 성찰을 통해서 생의 의미, 혹은 진선미의 존재 확인으로 귀일시키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역시 ‘중심꽃’이라는 신선한 제재의 발견만큼이나 깊이와 무게를 느끼게 한다.
실제로 꽃집에서 꽃바구니를 꾸밀 때에는 밥티만한 하얀 꽃떨기의 안개꽃은 전체 분위기를 환상적으로 감싸주는 주변꽃이 된다. 그에 의해 돋보이도록 두세 송이의 장미나 카네이션을 그 중심에 꽂는다. 자욱한 안개꽃 속의 빨간 꽃이 중심꽃이 된 것이다. 카메라는 피사체를 빠짐없이 인화지에 옮겨 놓지만, 사진작가의 주제의식에 따라 카메라의 초점을 중심 피사체에 둘 수도 있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윤현순의 심장을 채우고 있는 시의 핵심은 중심꽃으로 피어난다. 이 중심꽃은 사람을 바짝 긴장케 하거나 감성의 바닷물이 출렁이는 꽃의 은유를 통해 지루한 일상이나 세상의 간섭과 억압된 세계에 저항하고, 피곤한 인간의 심성을 말끔히 정화하는 생명력으로 작용한다. 이 생명력의 조화와 그 능력은 밝은 것과 어두운 것, 강한 것과 약한 것, 딱딱한 것과 부드러운 것 등이 서로 어울려 생의 질서를 조절하고 지시한다.
그는 삶에 있어서의 시공의 경계나 선악의 경계가 없는 완전한 전일성의 자연계나 인간의 섭리세계에서 생명의 근원을 탐색하고 그 삶의 본질이나 미덕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시인이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두고 보아도 좋다. 그러나 한 발 물러서서 다시 보면 자연의 섭리세계와 질서와 조화라는 것에서도 그 안에 깃든 영혼은 항시 사람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좋든 싫든 사람에 의해 그것은 시시각각으로 변모되기 때문이다. 비록 떨리는 손이지만 조심스럽게 자연의 모양이나 위치를 바꾸어 놓고 보면 그 생김생김이 더 새롭고 아름다울 수 있다. ‘중심꽃’은 결국 이와 같은 변화와 조합, 합일과 조화에 의한 생명의 환희에 답을 보내는 시이고 중심꽃이다. 그러므로 시의 색채와 향기는 생의 집약된 반사로써 생명의 우렁찬 찬미와도 같은 역동성으로 승화된다. 더불어 생의 자각으로부터 눈을 뜬 최고 최선의 자아 인식으로 귀납되기도 한다. 그런 뜻에서 뿐만 아니라, 그가 원불교 신자라는 측면에서 본 중심꽃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요 제불 제성의 심인(心印)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이라는 종교적 진리의 사고 실험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어찌 생각하면 자기 구원의 방편이나 죄악으로부터의 도피 행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종교를 통해서 신물나는 이 세상의 불의한 억압과 보이지 않는 사슬을 끊기 위한 절대의 자유에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구원 심상의 현실적인 욕망이나 희망이 그의 시에 있어서 꽃과 시를 하나로 묶은 삶의 세계와 그 상징으로서의 자연 조화에 대한 경외심으로 변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렇다. 수십년을 꽃과 어울려 꽃이 되어 사는 사람은 시적 영감의 화신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또한 생활과 취미의 일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꽃에 관한 양면성, 즉 시적 영감과 생활 취미라는 추를 양손에 쥐고 상상의 세계를 마음껏 여행하는 시인이다. “빛이 뚫지 못한 곳에/얼마나 많은 것들이 감추어져 있었던가/그 속에 완전한 비밀은 없다/(……)/더 꾸밀 것도 없는 /그 하나,/ 마저 놓으려고 내 작은 우주 속으로 들어간다”(「중심꽃21」2연)고 노래한 것을 보아도 무소유와 자아 발견이라는 두 세계를 동시에 여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시의 영혼을 찾아 ‘피안’까지도 헤매다닌다. 거기서 ‘절대 절명’의 ‘나’를 찾는 일까지 벌인다. 그러나 ‘본래의 나를 묻고 또 하나 나를 가두고 돌아오면서’ 한가위 보름달을 구경하고, ‘두 손에 가득 찬 우주’를 펴 본다. 그가 의식의 해방에 의해 무한한 우주와 자기의 내부세계를 여행하고 돌아옴으로써 꽃이야말로 그의 시에 가장 크게 기여한 공신으로 자리잡는다. 그러므로 꽃은 언제나 환상적인 유혹이었던 것이다. 꽃으로 말미암아 그의 개아(個我)가 크게 열렸고, 삶의 비전을 고양시켰기 때문이다.
①폭풍 주의보가 내리고 밤바람이 차갑다
솔밭 귀퉁이 해변마저 문을 닫고
백사장은 완전 어둠이다
가끔 얼굴을 내미는 별 가까이
잠을 포기한 갈매기 한 쌍 먹이를 찾고 있다
파도가 드세다, 물이랑이
절벽을 오르려고 차고 또 차는 힘,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다
허공을 끌어다 부수고 구름을 끌어다 부수고 마침내
강물까지 끌어다 부수는 저 힘이
내 안에 무엇을 끓게 한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무엇, 하여 지금 나를 잊고
당신을 잊고 세상을 잊은 그 자리에서
설 자리를 찾는다, 어디에서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꽃이고 싶다
바람과 파도 속에 부서지는
한 송이 중심꽃이고 싶다.
-<중심꽃1> 전문
②미쳐 눈길을 쏟지 못해
생기 넘치던 동백잎이 시들어 버렸다
꽃보다 붉은 미안한 마음을 잘라
수반에 꽂았다
꼭 그만큼씩 어울려
제 몫을 하는 꽃
어떤 모양이든
쓰는 사람에 따라 앉을 자리가 생긴다
오늘은 시들어 버려질 동백이
세상의 중심꽃이 되었다.
-<중심꽃18> 전문
시적 영감의 절정을 추구하고 있는 자아와 순수 자연과의 거리감을 일치시키려는 데서 오는 고충을 노래한 시이다. ‘중심꽃’은 그 자신의 대승적 자각 혹은 정각(正覺)을 전제로 한 제재이다. 소유했다가 그냥 버리는 꽃이 아니다. 쾌락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도시화, 산업화에 매몰된 세상이나 문명에 대한 반성을 전제로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메시지가 곧 ‘중심꽃’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러한 반성과 조화를 위한 집중과 드러냄이 그가 끝내 찾아야 할 가치이고 세워 나가야 할 목표인 것 같다.
‘폭풍 주의보’ ‘완전한 어둠’ ‘절벽’ 등의 시어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그가 탐구해 가는 삶의 대각 정행은 종교적 고난 극복이나 득의를 위한 험로인 것이며, 그에 따른 선택이 어떠하리라는 점은 그 자신 역시 잘 알고 있는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의 절정에 피어 있는 중심꽃을 찾아가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나’와 ‘당신’을 잊고 “그 자리에서/설 자리를 찾는다, 어디에서 어떤 일을/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단독자가 된 자신을 향해 질문하는 것은 곧 ‘바람과 파도 속에 부서지는/한 송이 중심꽃’의 고난을 이미 간파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그런 사실로써 그의 탐구 의지는 바로 정각 정행의 험로로 수용된다.
그리하여 불교 지향적 깨달음에 가까운 ‘중심꽃’은 시의 달관된 세계를 예감케 한다. 그것은 더 나아가 역사와 시공을 넘어선 자연에로의 귀의일 것이며, 존재 의미를 초월적 각성의 이미지로 표상한 종교적 탈속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다.
윤현순이 그가 있어야 할 자리와 영혼의 개화 절정을 중심꽃으로 표상하고 있다고 이미 전술한 바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의 ‘중심꽃’이 전혀 낯설거나 어설프지 않게 자리잡아 감을 느낄 것이다. 따라서 ‘물이랑이/절벽을 오르려고 차고 또 차는 힘’ ‘허공을 끌어다 부수고 구름을 끌어다 부수고 마침내/강물까지 끌어다 부수는 힘’이 있고, 그것은 ‘내 안에 무엇을 끓게 한다’고 자신의 내부 감각을 실토함으로써 자아 탐구와 성찰의 의지를 함축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중심꽃의 시적 발상은 생의 목적이나 종교적 각성, 자연의 섭리세계나 심오한 철학적 깨달음에 의해 구체화된 이미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의 상처를 지우고/이승과 저승 하나로 묶는 삼세 윤회의 꽃꽂이” (「중심꽃2」끝연)는 바로 종교적 해탈에 값하는 깨달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수억만 갈래 꽃가지를 마음 속에 들인다
꺾일 것은 꺾이고
휘일 것은 휘어져 있다
너와 내가, 동과 서가 얽히고 얽힌
또 하나의 세상,
황적흑백 사람의 낙원이다
꽃은 꽃끼리 얼굴 맞대고
가지는 가지끼리 어울려
비좁으나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중략)
아름다운 것은 꺾이고 휘어져야 완성된다.
-<중심꽃4-꽃바구니를 보는 마음> 전문
이 시는 인류 역사에서 너와 나, 동과 서, 그리고 ‘황적흑백’이라는 인종적 차별과 민족주의가 주도하는 갈등, 모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보여준다. 동시에 ‘사람의 낙원’을 “꽃은 꽃끼리 얼굴 맞대고/가지는 가지끼리 어울려/비좁으나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비유로써 설파하고 있다. 분열과 반목보다는 각기 다른 존재들이 제 위치를 차지하고 하나의 통일된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자연의 일이며 섭리세계이고 그 질서라고 말함으로써 낙원이라는 세계평화의 가능성까지를 탐구하고 있음을 본다. 이러한 평화주의와 낙원을 자연의 속성에서 발견하고 있는 그는 ‘꺾일 것은 꺾이고/휘일 것은 휘어져야’ ‘완성된다’고 주장한다. 사실 만물은 제각기 제가 있어야 할 위치와 제가 해야 할 몫이 따로 있게 마련이다. 사람의 살아가는 일 자체가 이와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평상심으로 돌아가 진공 묘유의 실체를 깨닫는다는 것은 곧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단초가 된다. 그런데 역사는 모순과 분열과 충돌로 말미암아 만들어진다는 말을 부정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말하면 일제 강점기의 압박과 설움을 죽음으로 대항한 순국이 그렇고. 6․25한국전쟁이 그렇고, 오늘의 분단상황이 그런 경우이다. 그의 ‘중심꽃’이 역사의 모순을 헤치고 통일의 열망으로 피어날 것이라는 예감도 거시적인 전체성과 균형을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가 채워지면 다른 하나가 비워진다는 사실, 채워졌으니 더 있는 것도 아니고, 비워졌으니 모자라는 것도 아닌 전체성과 균형, 그 속에서 역사의 가려진 얼굴이 있음을 그는 일찍이 간파한 것일까?
지리산 밭머리의 대나무 뿌리와 오대산 칡넝쿨로
통일전망대의 느낌을 꽂는다
동행한 아버지의 마음도 담아
내 팔을 마저 내주어도 좋다
아니, 온몸을 내주어도 좋다
한 살[肉]이 되어 천지가 다시 태어날 길이라면
마음 다 주고 허공 한 잎으로 살겠다
얼마나 아파야 하나가 될까?
어디를 터주면 연결이 될까?
전망대에서 본 금강산이 수반에 앉았다.
-<중심꽃3-합하는 것만이 능사?> 전문
시인이 꽃바구니 하나를 꾸미는 일은 곧 통일을 성취하는 일이다. 통일전망대는 민족의 염원이 고스란히 결집된 역사의 현장이며 민족정신이 모아진 상징적 누각이기도 하다. 시적 화자의 아버지는 한국전쟁으로 한 팔을 잃은 희생자이다. 그러면서도 남은 몸을 조국 통일에 바쳐 민족 숙원을 이루고 싶다고 한다. 이것은 아버지의 독백이다. 몸과 함께 “마음 다 주고 허공 한 잎으로 살겠다”는 결의가 아프게 가슴을 친다. 그러한 정신으로 윤현순의 중심꽃은 변용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와 꽃은 아름답다. 통일전망대에서 본 ‘금강산’을 수반에 앉히고 있는 그의 시심은 역사의 현장, 살아 있는 현실, 시공을 넘나드는 우주 감각으로 ‘중심꽃’을 꽂는다. ‘볼이 맑은 우주’ ‘바다에 온 몸을 맡긴 섬’ ‘허공으로 무전을 치는 밤’ ‘영겁의 인연’ ‘허공을 빠져나와 달에 잠시 닿은 나’ ‘우리 사는 세상의 중심꽃’ 등 그의 상상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중심꽃13」은 ‘외로움’이라는 부제를 달아놓고 아름다운 서정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장지문 밖에 눈 쌓이는 소리
눈길 위를 깨금발로 가는 바람
쌍과부댁 뒤안 댓이파리 서걱이는 소리
그래서 파르르 떠는 문풍지
이십 청상 비단 이불 뒤척이는 소리
사립문 밝히고 흔들리는 호롱불
꿈길 훔친 사내의 배꼽 같은 초사흘달
빈 댓돌
아직도 떨고 있는 문풍지.
윤현순의 섬세한 감수성과 여성적 정취가 돋보이는 시이다. 맑고 깨끗한 언어의 빛을 비유와 감각으로 발산해낸 이 시는, 지금까지의 무게 있는 메시지 중심으로부터 한 발 떠나, 감각 그 자체만으로 순수미를 드러낸 시이다. 이제 ‘중심꽃’을 감싸주고 있던 주변꽃이 안개꽃이었다면, 이 시는 바로 중심꽃을 위한 안개꽃의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소리, 바람, 문풍지, 호롱불, 초사흘달, 댓돌 등의 사물을 통해서 시적 화자의 ‘외로움’이 미적 호응을 얻게 되는 까닭도 군소리 하나 없이 알맹이말로만 묘사되어 있고, 명사로 행을 마무리하여 시의 구조화에도 각별하였음을 엿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의 순정한 서정적 자아와 신중하게 파고드는 추구정신이 ‘중심꽃’ 100편의 여기저기서 제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과 같이, 앞으로의 우리 시문학사에서도 윤현순, 하면 ‘중심꽃’으로 통할 수 있는 부단한 노력과 정진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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