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과 시론

[스크랩] 시, 한 포기의 사랑 / 남유정

영관님 詩 2010. 5. 7. 20:05

시, 한 포기 사랑

                                                                                                                                                       남유정(시인)

 

바람소리는 상수리나무 숲을 타고 내려와 뒤란의 나무들을 차례로 켰다. 산비탈을 끼고 앉은 할머니 집은 뒤뜰이 더 넓었다. 과일나무에서 하얀 찔레꽃, 도라지꽃, 나팔꽃 등에 이르기까지 꽃이 줄지어 피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다섯 남매를 감당하기 어려우셔서 나는 자주 할머니 댁으로 보내졌다. 할머니 댁에 가려면 버스에서 내려 4, 50분은 족히 걸었던 기억이 난다. 방죽을 지나고, 연꽃이 핀 연못을 돌고, 숲을 지나면 집이 다섯 채 정도 있는 샛골이 나왔다. 소운동장만한 바깥마당은 턱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이어졌다. 왼쪽으로는 낮은 산이었고, 오른쪽으로는 너도밤나무 숲이었다. 언덕을 내려오는 바람소리는 내 가슴의 외로움을 일깨웠다. 산골짜기를 뛰어다니다 들어와 감나무 아래 어둠이 내려앉는 것을 보곤 했는데 그 때마다 적막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별이 쏟아지는 밤이면 달팽이관은 먼 우주의 행성이 걸어가는 소리에 귀를 열게 했다.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밤, 베갯머리에 얼굴을 묻고 바람소리를 가슴에서 풀어내며 잠을 청했다. 철로 위를 철커덕철커덕 지나가는 기차소리에 먼 곳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늘 막막했다. 그리고 어디론가 끊임없이 걸어가는 꿈을 꾸곤 했다.

 

1.

 

굴참나무 숲을 빠져나가면/새소리로 피어나던 하얀 찔레꽃/산비탈이 빠르게 내려오다 멈추는 곳에/유년의 집은 있다/할아버지의 마른기침이/두터운 안개를 흔들어 보는 새벽/여물죽 끓이는 아궁이에서는/풍구에 맞춰 타닥타닥 왕겨가 빨갛게 타오른다/닭이 홰를 칠 때면/부지런히 앞마당의 안개를 걷어내며/소울음이 긴 언덕의 능선을 타고 사라진다

 

2.

 

그 자리, 이끼 낀 장독대 아래/풀잎에 가려진 돌/메워진 우물처럼/닫고 산 세월이 있다/우 물가에서 바라본 별/오래 돋지 않는 날들/언제라도 쏟아질 폭우의 전야/돌절구에 고인 빗물처럼/슬픔은 안으로 고여 있다//첨벙!/캄캄한 우물 안으로 두레박이 닿는다

 

3.

 

솔잎이 향기로워/입 안에 물고 앉는다/솔바람 소리는 무량의 세월을 돌아 다시/내 몸으로 흐르는가/가지 휘도록 익어가는 감을 안고/오래 전 나무가 눈인사로 부른다/안고 온 보따리 속/무거운 한 시절의 궤적이/왈칵 토해 놓는/저 눈부신 고샅길의 고요한 상승!

- 졸시 「옛집을 찾아서」 전문

 

시의 씨앗은 적막하고 쓸쓸하며 정다운 자연의 풍경 속에서 이미 오래 전 꿈틀거렸는지도 모른다. 애벌레처럼 순하게 잠들어 있는 추억의 방! 내가 온몸으로 들었던 자연의 언어는 이미 완벽한 시가 아니었던가?

씨앗은 내가 스스로 심지 않았다 해도 새가 물어다 떨어뜨렸거나 바람에 날아왔거나 틈에 떨어져 숲을 이루는 나무처럼 그것은 내 영토에 몸을 묻고 오래도록 기다렸을 것이다. 가꾼 일도 없으니 캄캄히 눈도 뜨지 못하고 입도 열지 못한 채 세월을 견뎠을 것이다. 싹이 트기 위해 씨앗은 제 몸에 일정한 온도와 시간을 저장했을 것이다. 배가 불러오도록 몸에 생명이 자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아둔한 여자처럼 시가 그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내게로 와서 사는 줄 몰랐던 것이다.

 

너는/적막 속에 오래 잠자던/씨앗인지도 모른다/나는 또/오래도록 너를 품은/한 줌의 행복 한 흙인지도 모른다/바람에 스치는 생의 물결 소리/어쩌면 너는/아직 다 보여주지 않은 사랑인지도 모른다

-졸시 「시」 전문

 

시는 삶이라는 영토에 뿌리를 내리며 자라는 한 포기 사랑이다. 견딤의 방식이고 소통이며 상처를 치유하는 사랑이다. 내게 온 시를 푸대접 했던 시절도 있다. 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회의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의심하지 않는다. 더더욱 밀어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일상의 언어로는 속 시원히 소통할 수 없는 부분이 시를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꺼이 시에 기대는 것은 내게 무거운 삶을 경쾌하게 하는 소통의 방식이기도 하다. 또한 영원으로 흐르는 시간의 강물에서 표류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시를 통해 고독의 근원에 다가갈 수 있다.

 

고독은 나를 단련시키는 불길이다. 뜨거운 불길 속에 가부좌를 튼다. 시는 견디게 하는 힘이다. 견딜 수 없는 것들을 바라보게 하는 눈이다. 그 눈은 나의 내부에 있으면서 또한 밖에서 나를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 무엇에도 위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언젠가 물에 빠진 자식을 건져내어 들쳐 업고 달려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노점상을 팽개치고 달려온 어머니는 늘어진 아들의 천근같은 몸을 가벼이 업고 내달리고 있었다. 비녀를 찌른 머리카락은 흘러내리고 신발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단숨에 논둑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이미 죽은 자식의 몸을 업고 초인적인 힘으로 달리던 어머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식을 업고 달려가던 어머니는 어떻게 남겨진 시간들을 견뎌냈을까? 고통의 중심에까지 걸어 들어가야 하는 것이 삶이라면, 어차피 삶이 홀로 대면해야 하는 시간과의 싸움이라면 오롯이 견딜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절박함에 있어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누구나 삶의 위기를 피할 수는 없다.

 

시를 쓴다는 것은 나 자신의 고통 안으로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다. 때로 외과의사의 손에 들린 칼처럼 날을 세우고 고통과 상처를 바라보아야할 것이다. 늘어지는 정신의 살점들을 자극하며 일으켜 세워 허공에 집을 짓는 일이다. 그 덧없는 작업을, 마치 마지막 소명인 양 매순간 매달리는 것이다. 실을 뽑아 제 고치를 짓는 누에의 뜨거운 밤처럼.

 

꽃 한 송이가 비바람을 견디듯이/작은 나룻배가 거친 물결을 달래듯이/엎드린 다리가 무수히 제 등으로 차들을 달리게 하듯이/터져 나오는 비명이 몸을 견디듯이/몸이 마음의 결핍을 견디듯이/사는 것은 누구에게나 왜 견딤이 아니랴/뿌리 뽑히지 않기 위하여/나무는 바람에 흔들리고/산은 제 무게를 견디기 위하여/스스로 흘러내려 봉우리를 만든다/넘치지 않기 위하여 강은 오늘도/수심을 낮추며 흐른다

-졸시 「견딤에 대하여」 전문

 

견딤에는 필연적으로 고통의 의미가 내재해 있지만 그 고통은 거부할수록 더욱 우리의 숨통을 조일 것임에 틀림없다. 고통을 극복하는 것은 그 안에 잠기는 것이다. 내게서 밀어내기보다 함께 가는 것이다. 고통에서 깨어있는 것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온전히 견딘다는 것이며 적극적으로 산다는 의미일 것이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햇빛이다. 음지에서 몸을 뒤틀며 다가가 만지고 싶은 따뜻함의 정체가 사랑이 아니라면 다른 말로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작은 틈으로 새어드는 빛을 향해 씨앗은 온몸의 촉수를 뻗으며 발돋움 한다. 허기와 갈증으로 키를 세우고 절박함으로 잎을 연다. 그렇게 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라 어느 날 문득 꽃이 된다.

 

실낱같은 틈새로/너의 마음이 들어와/바위 틈새에서 들꽃 한 송이 피어나듯이/사랑이 피어났지//사랑,/그 눈부심이/슬픔이/절망이/생의 작은 틈바구니에서 피어났지

-졸시 「틈」 전문

 

순간의 꽃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하지만 꽃은 늘 절정에서 뛰어내려야 한다. 낙화의 운명을 몸으로 아는 것이 사랑이다. 꽃이다. 모든 사랑은 비탈을 지닌다.

전시회장에서 ‘지상의 방 한 칸이란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숲 그늘 아래 작은 풀꽃이 피어 있었다. 우리의 목숨도 생의 틈바구니에서 눈부신 절망을 안고 피어난 한 포기의 사랑에 다름 아닐 것이다. 실존과 덧없음 사이 겹겹이 포개어진 연한 꽃잎을 시라고 부르면 안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는 무엇인가? 시에 대한 질문은 삶을 향한 질문과도 같다. 삶은 여전히 내게 물음표다. 시 역시 삶에 대한 질문의 한 방법이 아닐까? 질문이 길을 내고, 나는 그 길 위에 서 있다. 사람은 한 점에서 시작하여 무수히 선을 그으며 세상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지만 알 수 없는 것이 삶이며 사람이다. 그러니 알려고 하기보다 사랑하는 것이 삶과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내 사유의 뜰에 뿌리를 내리는 시도 답을 찾아가는 질문의 여정일 것이다. 정답이 없다는 것, 내가 시를 사랑하는 이유다.

 

그대는 왔다, 그 많은 꽃들의 질문처럼//내가 끊임없이 대답하고 싶은 순간이면/그대가 나를 부르는 거라고 생각했다//몸 안의 시계가 더디 흐르고/강물은 나날이 불어났다//흐린 날이면 새들은 나지막이 날고/비가 올 때 나비는 꽃그늘 아래 날개를 접었다//여전히 그대는 내게 질문으로 남은 한 그루 나무다

- 졸시 「질문으로 남은 한 그루 나무」 전문

 

물결에 몽돌 씻기는 소리를 듣던 유년의 시냇가에서 너무 멀리 왔다. 멀리 왔다고 하지만 여전히 나는 일찍이 내가 받아들인 풍경 속에서 한 발자국도 걸어 나가지 못한 것은 아닐까?

 

낙타가 산다. 낙타를 키운 것은 나다. 고통이 몸과 마음에 상처를 줄 때마다 낙타는 불끈불끈 자란다. 그러나 낙타는 순하다. 내 몸에 사는 낙타가 내게 노래하는 법과 사는 법을 가르친다. 사막과 함께 오아시스를 보여 주었다. 불모의 사막을 건너 꿈을 쫓는, 그리고 마침내 꿈조차 가벼이 지나쳐가는 낙타. 바람이 모래기둥 하나씩을 세우면 이내 무너지는 거대한 모래더미 위로 몸 안에 키운 낙타가 나를 이끌고 간다. 사막이 기억하는 푸른 물길이 낙타의 몸에도 흐른다.

 

시를 쓰는 것이 허공 한 줌을 쥐기 위해 걸어가는 사막 위의 발자국 같은 것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타는 순하게 걸어갈 것이다.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것을 몸에 키우며 꽃잎처럼 연하디 연한 시를 써야 하리라. 그러기 위해서 좀 더 힘을 빼야 할 것이다. 한 포기 사랑은 가장 부드러운 혀로 흙을 핥으며 나오니까.

 

그에게는 모서리가 없다/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물의 되새김으로/닳아 둥글려진 자리/사랑을 낳는다/닭의 둥지에서 막 꺼낸/따뜻한 알을 만질 때의 느낌으로/시를/하루 종일 품고 다닐 때도 있고/달게 먹을 때도 있다/왜 시를 쓸까?/저 세상에 갔을 때/이승의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그는 깊고 맑은, 따뜻한 눈으로/지평을, 그 너머를 본다

                                                                                                                                      - 졸시 「시인」 전문

                                                                                   (월간『우리詩』 제231호)

출처 : 우리시회(URISI)
글쓴이 : 홍해리洪海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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