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詩

[스크랩] 제 1회 전북 시인 초청 시낭송의 밤

영관님 詩 2010. 9. 13. 21:04

 

 

 

자   화   상
                                                                              -  서정주  -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화사집>(1941) -

 

해        설

  

 [개관정리]

성격 : 회고적, 서사적, 상징적, 격정적, 자전적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애비는 종이었다(종의 자식)

          → 개인적 솔직성을 넘어서서, 뚜렷한 자기 주장과 도적적인 개인의식을 느끼게 하는 신선한 충격을

                    주는 표현이며, 망국민으로서의 노예적인 삶을 상징하는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

    *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 → 쓸쓸하고 음울한 분위기 (가늘고 연약한 모습)

    * 달을 두고 → 여인이 아이를 가짐을 의미함

    *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 가난에 찌든 어린 화자의 모습

    *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

             → 동학혁명에 가담하여 죽음을 당한 사실이 암시된 표현

                 외할아버지는 주어진 조건에 타협하거나 굴종하지 않고 저항하고 투쟁하는 인물임을 알게 해 줌.

    * 바람 → 끊임없는 방랑, 난폭함, 정처없음, 무절제, 세상 속에서의 시달림, 흙먼지와 추위 같은 것들

    * 눈, 입 → 세인들에게 죄인과 천치로 인식될 정도로 온갖 수난과 역경 속에서 부대껴온 고달픈 운명의 표정

    * 죄인, 천치 → 타인이 나에 대해 규정한 것으로 문면에 드러나지만, 천한 출생 성분에 대한 못난이 의식,

                                무지함에서 오는 열등의식이 담긴 표현으로 보임.

    *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 굴욕적인 삶에 맞서려는 의지. 삶의 시련과 고통은 오히려 그로

                                  하여금 더욱 굳세게 일어나도록 하는 힘이 됨.

    * 시의 이슬 → 괴로운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의 열매

    * 몇 방울의 피 → 시련을 극복하는 삶에 요구되는 노력과 고통

    * 병든 수캐 → 고통스런 삶과 강렬한 생명에의 욕구를 지닌 자아의 모습

    *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자신의 고통스런 삶에 대한 쓰디쓴 회고를 하면서도, 버릴 수 없는 생명적 욕구에의 강렬함을 확인

           봉건적이고 부정적인 사회 현실 속에 매몰되지 않고 개처럼 헐떡거리며 살 것을 강요하는 현실에 대해

                          자기 자신을 대결시키려는 저항의지의 표출

주제역사적 시련기를 겪으면서 살아온 한 개인의 고통스런 삶에 대한 회고

                토속적 삶의 모습과 시인 자신의 실존적 몸부림 탐색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봉건적인 사회 제도하에서의 비참하고 가난한 삶의 모습 제시(불행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

◆ 2연 : 고난의 바람과 부끄러운 성장 및 허심탄회한 심정(시련기의 삶에 대한 회고)

◆ 3연 : 고난의 삶의 승화(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회고)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미당이 스물 셋의 나이에서 자신이 살아온 지난 생애를 회고하는 내용이다. 그가 이 글에서 밝히고 있는 그의 가족사와 이력이 사실에 얼마나 부합되는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과장하거나 미화하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일텐데, 도리어 그는 자랑스럽지 못한, 부끄러워 감추려고 할 만한 자신의 과거를 솔직하게 밝히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비상한 충격과 함께 신선한 감동을 자아낸다.

제1연화자의 사회적 존재를 알게 해 준다. 그는 종의 자식이며 갑오년인가에 집을 나가 끝내 돌아오지 않는 외할아버지의 피를 받았다. 갑오 동학 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생각하면, '애비는 종이었다'는 첫 구절은 개인적인 솔직성을 넘어서서 차라리 떳떳하고 당당하며 도전적이기까지 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그가 봉건적인 사회 현실 속에 매몰되어 있지 않음을 뜻한다. 이런 유의 당당함이란 그 자신이 역사 발전의 주체라는 자각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이 자각된 입장이, 개처럼 헐떡거리며 살 것을 강요하는 현실에 자신을 대결시키는 저항 의지로 나타난다.

제2연은 바로 봉건적인 인간 관계가 한 개인에게 부과하는 굴욕적인 삶과 그것에 맞서는 의지의 표현이다. 불평등한 인간 관계 속에서 어떤 이는 죄인, 천치 취급을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뉘우치지 않는다. '스믈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는 구절 속에서 우리는 그가 그러한 시련을 통해서 오히려 굳건해진 사람임을 알게 된다. 굴욕적인 현실은 그를 주저앉히기는커녕 오히려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의지로 끌어올린다.

그런데 제3연의 1-3행에서 현실적 고통을 오히려 반짝이는 시의 이슬로 승화시킬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침'은 새로운 인간 관계의 지평이 열리는 순간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혁명과도 같은 아침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다. 물론 문맥적으로는 그 피가 시의 이슬에 맺혀 있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시'와 '아침'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공통적으로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의미한다. '아침'으로 표현된 인간적인 진실 속에서만 참다운 '시의 이슬'이 맺힐 수가 있는 것이다.마지막 대목에서 `병든 숫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고 그가 말하는 것은, 그러므로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쓰디쓴 회고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릴 수 없는 생명적 욕구에의 강렬한 확인이 된다.

 

 

Ralf E. Bartenbach - Loving Cello 09:25

 

출처 : 전북시낭송협회
글쓴이 : 새시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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