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소설

[스크랩] 경기전 뜨락의 청매와 홍매/ 양봉선

영관님 詩 2011. 10. 12. 18:54

<2011 전북펜 10호 원고>

*** 내고장 이야기 ***

경기전 뜨락의 청매와 홍매/ 양봉선

유난히 덥던 여름을 잘 이겨낸 곡식과 열매가 토실토실 영글고 하늬바람이 마음을 설레게 하는 토요일 오후.

출퇴근하느라 느끼지 못한 가을의 풍경을 가슴에 담고자 시간을 쪼개어 전주 천으로 나들이를 나섰습니다.

모처럼 반복되는 삶을 훌훌 날려버리고 가볍게 걷다보니 작은 물오리 두 마리가 물길 따라 자맥질하며 들락날락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억새밭에서는 수많은 참새들이 숨바꼭질하는 듯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사뭇 정겹게 들립니다.

참새들의 작은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재미를 혼자만 느낄 수 있어 그냥 행복합니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전주 천을 벗어나 한옥마을에 있는 경기전을 향하여 걸음을 옮겼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경내를 돌며 선인들의 음덕을 되새겨 보는 계기를 만들고, 뒤꼍에 고고한 자태로 만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청매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입니다.

경기전에 다다르자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이때껏 본 예전의 한산한 풍경이 아니었거든요.

외국인과 타지에서 구경 오신 방문객들이 엄청 많았습니다.

전주라는 곳은 풍류가 살아 숨 쉬는 맛과 멋이 어우러진 예술의 고장이라는 소문이 거짓이 아니라는 게 증명된 셈입니다.

마음의 풍요를 위한 나만의 공간인 양 느긋이 뜨락을 거닐면서 사색에 잠겨보려던 생각은 저 멀리 사라졌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반길 준비를 하고 있는 빈 의자에 앉아 바람소리를 벗 삼아 시집을 읽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꽤 오랫동안 은행나무에 기대고 서서 드넓은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며 빙그레 미소를 자아냈습니다.

그 후,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서걱거리는 대나무 숲의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100년을 넘게 살아 온 매화나무 곁으로 다가가 가만히 귀를 기울여 봅니다.

이른 봄에 꽃망울 트는 날을 놓치지 않고 찾아와 나직이 숨을 고르며 그윽한 매화 향을 맡았던 그리움이 찰랑이는 날이었습니다.

아무런 조건도 없는 행복은 저절로 오는 게 아니라 만드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더군요.

가까이에서 풍상의 아픔을 잘 견뎌낸 청매를 바라보다가 3년 전 단짝을 만들어 주고자 동심원 원장님이 홍매를 기증하실 수 있도록 작은 도움을 줬던 그 날을 떠올리며 마냥 흐뭇해합니다.

오늘, 경기전에서 경내 뜨락을 거닐다가 천진스런 어린이들을 만났고, 옆 대나무 숲에서 빛바래지 않은 순수한 여고생들을 만났으며, 오롯이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 같은 청매와 홍매를 만나 얼마나 소중한 시간을 보냈는지 모릅니다.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이 더 어려운 게 인생이라 생각되는 요즈음.

은은한 매화 향기처럼 멀리 있어도 가까운 사람이 되어 건강이 허락하는 한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좋은 사람들을 만나 부지런히 행복을 지으며 살아가렵니다.

<동화>

들꽃과의 만남

양 봉 선

시내를 조금 벗어나면 들꽃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공원이 있어요.

거기는 수요일마다 유치원에서 자연학습 가는 곳이죠.

오늘은 평소와 달리 눈에 잘 띄는 빨강모자에 청바지를 입어야 해요.

태민이는 이불 속에서 눈을 뜨자나자마자 엄마를 불렀어요.

"엄마! 빨강 모자랑 청바지 찾아주세요."

주방에서 도시락을 싸던 엄마가 호들갑을 떠는 태민에게 다가와 말했어요.

"왕자님, 침대 위에 준비해 놓았습니다. 어서 입고 나오시지요."

"울 엄마, 최고!'

태민이는 벌떡 일어나 엄마 품에 안기며 어리광을 부렸어요.

엄마는 태민이가 귀여운지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어요.

"김밥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예쁘게 만들어 놓았다. 소연이랑 나눠 먹으렴."

"우와! 맛있겠다. 감사합니다."

유치원 차를 타고 공원에 가는 동안 선생님은 밖에서 조심해야 할 일들을

반복해서 말씀하셨어요.

공원에 다다라 버스에서 내리자 태민과 친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다른 날과 달리 사람들이 엄청 많았기 때문이지요.

선생님은 버스에서 내린 친구들을 모아 세우고 다시금 되물으셨어요.

"얘들아!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선 어떻게 해야 되지?"

똑똑한 소연이가 야무진 목소리로 말했어요.

"짝꿍의 손을 꼭 잡고 선생님 뒤를 쭉 따라 다녀야 해요."

"그래. 혼자 돌아다니면 안 된다. 알았죠?"

"네. 선생님!"

친구들 모두가 공원이 떠나갈 정도로 우렁찬 대답을 했어요.

병아리처럼 선생님 뒤를 따라 걷는 친구들의 모습이 보기 좋은 듯 어른들이 길을 비켜주며 무럭무럭 자라 훌륭한 나라의 일꾼이 되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공원에 핀 들꽃의 종류는 얼마나 많은지 손으로 셀 수가 없었어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열 하나, 열 둘, 열 셋, 열 넷, 열 다섯…….등등.

들꽃의 이름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마음에 드는 꽃은 많았지요.

저번 주에 왔을 때 일어난 일이예요.

수많은 꽃 중에서 제일 작고 귀여운 들꽃에 반해 버린 태민이는 꺾어서 혼자만 보고픈 마음이 들었으나 소연이가 말린 바람에 아쉬워하며 살포시 감싸 안고 스쳐 지나갔었지요.

그런데 오늘 그 작고 귀여운 들꽃을 다시 보게 되어 반가운 마음에 가까이 다가섰더니 태민이의 마음을 아는 듯 고맙다 손짓하는 게 아니겠어요?

"태민아! 네가 다시 찾아와 고마운가 봐."

소연의 말을 듣고 자세히 보니 정말 그렇게 보였어요.

"응. 내 가슴에 스며든 들꽃과 맘이 통했거든. 반갑다 들꽃아!"

둘이서 주고받은 이야기를 들꽃도 알아들은 듯 덩달아 춤을 췄어요.

자연을 벗 삼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구경하다보니 태민이 뱃속에서 갑자기 '꼬르륵 꼬르르륵'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태민이 배꼽시계가 점심시간을 알려준 거지요.

소연이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까르르 웃자 선생님도 웃으며 말씀하셨어요.

"태민이 배꼽시계는 어딜 가나 확실하니까 잔디밭에 도시락을 펼치렴."

"네. 선생님!"

태민이는 아침에 엄마가 정성스레 싸준 도시락을 풀며 볼우물 짓고 있는 소연이에게 말했어요.

"우리 엄마가 소연이랑 점심 맛있게 먹고 재미있게 놀다 오라 했다."

"그래? 우리 엄마도 한이랑 사이좋게 먹으라고 푸짐히 싸 주셨는데……."

"정말. 와~~~ 신난다."

가방 속에서 이것저것 펼쳐놓고 보니 또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졌어요.

왜냐고요?

태민이와 소연이 엄마가 싸준 음식이 한 가지도 똑 같은 게 없었거든요.

골고루 나눠 먹고 나니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이 하품이 나오는 거예요.

우정과 하품은 닮은꼴이라는 이야기가 생각나 서로 배꼽을 움켜잡았지요.

자연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태민이는 엄마에게 소연이와 즐거웠던 이야기꽃을 피우다보니 해가 봉숭아 빛으로 물들어 서산으로 넘어가는 줄도 몰랐대요. 끝. -원고지 11매 -

출처 : ♣전북펜♣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전북위원회
글쓴이 : 전북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