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언덕에 올라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김길남
영호남수필문학회 회원들이 근대문화를 받아들인 대구의 ‘청라언덕’에 올랐다. 더운 날씨라 걱정을 했는데 시원한 바람이 불어 다행이었다. 언덕으로 오르는 길은 돌계단이 많았다. 동산 위 웅장한 모습의 대구제일교회 첨탑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학창시절에 ‘사우’라는 노래를 배우면서 어디가 ‘청라언덕’인가 궁금했는데 오늘에야 그 언덕에 오르게 된 것이다. 미국의 선교사가 정착하여 교회를 짓고 병원을 세워 우리를 깨우쳐 준 곳이다. 높은 곳이라 돌계단을 오르는데 힘들었다. 그때 나라에서는 도시 가까운 평지에는 선교사가 발을 붙이지 못하게 했다. 민가에서 멀리 떨어진 높은 곳만 허용했다. 전주의 예수병원과 신흥학교도 산기슭에 있지 않은가. 대구도 마찬가지였다.
청라언덕에는 근대문화유산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백년이 넘은 제일교회와 선교사 사택, 동산의원 건물이 그대로 있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니 그때 벌써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앞서가는 사람들이었는가.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계성학교와 신명학교에 다니면서 신학문을 받아들이고 머리를 깨우쳐 나갔을 것이다. 이러한 교육의 힘이 뒷날 3·1운동의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학생들이 청라언덕에 모여 만세운동을 기획하고 봇물 터지듯 시내로 번져나갔다는 게다. 논밭에 엎드려 호미질이나 했다면 민족혼을 일깨우는 만세운동을 생각이나 했을까.
붉은 벽돌로 지은 옛집의 벽에는 담쟁이덩굴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이 담쟁이덩굴에서 청라언덕이란 이름이 생겼다. 푸를 청(靑)자에 담쟁이 라(籮)자다. 작곡가 박태준이 ‘사우’라는 곡을 지을 때 이은상이 청라언덕이란 이름을 지어 노랫말을 써주었다 한다. 얼마나 멋진 이름인가. 바로 집 옆에 노래비가 있었다. ‘사우’를 우리말로 ‘동무생각’이라 고쳐 큰 돌에 새겼다. 우리는 ‘동무생각’이란 노래를 우렁차게 합창했다. 2절까지 부르고 나니 가슴이 후련했다. 학창시절이 생각너머 저쪽에서 오락가락했다.
그 옆에는 늙은 사과나무가 서있었다. 선교사가 우리 농민들의 소득을 위해 처음으로 사과나무를 가져다 심었다고 한다. 1900년에 미국 미주리 주에서 72그루의 사과나무를 가져다 심은 게 대구사과의 시작이란다. 유명한 대구사과가 110년의 역사를 가졌다. 처음 심은 나무는 죽고 아들나무가 지금 있는 나무란다. 대구에서 보호수로 보호하고 있다. 넓지 않은 동산이 이처럼 많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계단 끝에는 오래 된 이팝나무가 서 있는데 ‘현제명 나무’란 팻말이 있었다. 현제명 선생이 이 교회에 다니면서 음악 공부를 하고 작곡을 했는데 이 나무와 연관이 있어 이름을 붙였단다. 때가 입하(立夏)인지라 꽃이 활짝 피었다. 나무가 온통 흰 꽃 덩어리다. 크기도 하지만 역사적인 나무라 더 관심이 갔다. 마침 바람이 불자 나부끼는 것이 마치 손을 흔들면서 우리를 맞아주는 듯하였다.
다시 돌계단을 내려와 밑에 있는 계성성당으로 갔다. 천주교 대구교구청 주교관이다. 오래된 건물 그대로다. 김수환 추기경이 서품을 받고 처음 이곳에서 사목한 성당이라고 했다. 또 1950년에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라고도 했다. 이름을 보고 주례가 육영수 군과 박정희 양이라 했다고 하여 모두 웃었다.
두 곳 모두 민족 근대화에 한 몫을 한 곳이다. 이런 곳이 아니었으면 우리의 문화는 한참 더 늦어졌을 게다. 선교를 목적으로 낯선 나라에 와서 교육을 하고 병원을 지어 어려운 사람들을 치료해준 그들이 고맙기만 하다. 넬리 딕, 스윗즈, 부루언, 마르타 스콧 부루언 등 12명이란다. 고향에서 부모형제와 단란하게 살아가면 얼마나 편하고 행복할까. 그들은 혼자만의 안일을 생각하지 않고 온 인류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는 우리나라 사람도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특별한 사명의식이 있어야 할 수 있다.
아무리 그들이 선교와 교육, 자선을 베풀어도 우리 국민 중에 협력하는 사람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의 정신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선각자가 있어서 가능했다. 서울, 평양, 전주, 대구 등지에서 먼저 나선 사람들이 뒷날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다. 안창호, 조만식, 이승만, 서재필 등이 있고 전주의 김인전 대구의 박태준, 현제명 등은 각 분야에서 큰일을 한 인물이 아니던가?
근대화의 씨를 뿌린 그분들에게 삼가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 2012. 5. 6. )
'수필과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인생의 가시/나희덕 (0) | 2012.08.10 |
---|---|
외할머니와 복숭아/김금례 (0) | 2012.08.03 |
이동순 시인과 함께/대구문학기행 (0) | 2012.05.09 |
보배섭-진도/서상옥 글 (0) | 2012.04.22 |
수필은 어떻게 써야하는가/최승범 (0) | 2012.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