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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금 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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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들 내외가 힘겨운 듯 끙끙거리며 들어왔다. 자식들이 집에 가져오는 과일을 보면 어느 계절인지 알 수가 있다. 오늘은 복숭아다.
상자속의 복숭아는 볼연지 붉게 칠한 수줍은 새색시처럼 예쁘게도 생겼다.
나는 복숭아를 좋아한다. 복숭아는 과식해도 탈이 없다. 복숭아를 보는 순간 외할머니를 만난 듯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할머니는 평생 복숭아 과수원을 가꾸면서 사셨다. 그래서 난 여름이면 복숭아를 많이 먹으면서 자랐다.
복숭아 농사는 여름 한 철이라 온 집안 식구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인다. 오늘은 애지중지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날 같다. 새벽에 일어나 복숭아를 따서 포장하고 예쁜 상자에 넣어 동네 모정 앞에 세워둔 자동차에 실어 보내야 하루의 일손이 끝난다. 잘 가라고 손을 흔들며
어깨에 걸쳤던
수건으로 땀을 닦는다.
나는 자라면서 과수원일이 참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할머니는 바구니에 복숭아를 담아 이 집 저 집 나누어 주면서 웃음꽃을 피우셨다. 아이들이
여름 방학이 시작되면 할머니는 전화를 하셨다. "애야! 복숭아 많이 따는 날이니 아이들과 함께 와서 복숭아도 가져가거라." 애틋한 할머니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출가한 외손녀의 손자까지 챙기시는 할머니셨다.
복숭아는 비타민A와 C, 펙틴질이 풍부한
알칼리성 식품으로
면역력을 키워주며 니코틴을 해독하여 가래와 기침에 좋다.
사과산과 구연산 등 피로를 풀어주는 천연 유기산이 들어있어 간 기능 개선과 혈액순환 개선 및 피부
미용, 위장기능 개선에도 좋아 여름철 과일 중 황제라고 불리고 있다. 나는 외가 덕에 복숭아, 복숭아 잼, 주스를 많이 먹고 자라서 지금까지
건강하게 지내는지도 모른다.
나는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6·25도 외가에서 보냈다. 가끔 막내 이모와 다투면 외할아버지는 "차라리 핏덩이랑 싸워라." 하시면서 내편이 되어주셨다.
여름방학을 하면 책을 짊어지고 외가로 달려갔다. 모든 식구들이 과수원에서 생활하다 보니 나도 과수원에서 놀았다. 따갑게 타올랐던 태양이 서산에 기울면 식구들은 반딧불을 벗 삼아 시냇가에서 목욕을 했다. 시원했던 그 기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느 날 저녁 할머니와 함께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과수원에서 지냈던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모기장 속에서 심청전을 재미있게 읽어주셨다. 그리고 장화홍련전과 춘향전을 들려주시느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할머니는 나에게 부채질을 해주시면서,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노래를 부르셨다. 그 때의 그 선한 눈빛이 생각난다. 세월은 가도 추억은 남는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두드린다. 노래를 부르시다가 바스락 소리가 나자, 멈추셨다. 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나를 꼭 껴안아 주시고 한참 뒤에 손전등을 켜고 기침소리를 내니 보자기를 든 사람이 도망치고 있었다.
"할머니! 복숭아 도독이지요?" "아니다. 동네 청년들이 저녁에 놀다가 배가 고프니 서리하러 온 것 같구나." 도둑이 아니어서 조였던 마음이 풀렸다. 할머니 모습이 어제인 듯 떠오른다. 할머니는 소탈하시고 겸손하시며 정이 많으셨다. 세월은 훌쩍 지나갔어도 할머니에게서 받은 정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서리를 도둑이라고 한다. 언젠가 산에서
감나무와 밤나무에서 과일을 조금 따다가 도둑으로 몰려 몇 배의 값을 물어 주었다고 한다. 세상이 그만큼 야박해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과수원을 가꾸셨던 식구들이 세상을 떠나고 과수원의
과일나무들도 고목이 되어 남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때는 어제인 듯싶은데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외숙모는 평생 복숭아와 함께 살다가 돌아가신 할머니의
제사상에 복숭아캔을 올린다고 하셨다. 여름에 복숭아를 보면 인자하신 할머니의 모습이 그리움으로 밀려온다. 나도 여생을 복숭아 향기 속에서 살아가고 싶다.
※ 수필가 김금례씨는'수필시대'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행촌수필문학회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수필집 '꿈의 날개를 달고'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