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소설

설날 일기/김학

영관님 詩 2013. 2. 14. 18:28

두루미 | 조회 2 |추천 0 |2013.02.14. 13:51 http://cafe.daum.net/angolessay/76eu/4148 

설날 일기

김 학

오늘은 2013 계사년 설날, 새벽에 눈을 뜨니 사발시계의 시침이 4시를 지나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었다. 잠자는 사이 나는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 예삿날과 다름없이 서재로 가서 컴퓨터를 열었다. 간밤에 받은 이메일이 가득 들어 있었다. 여느 때처럼 선별작업에 들어가, 도움이 되지 않는 소식은 그대로 지우고, 필요한 설날축하 메일엔 고맙다는 답장을 보냈다. 또 유익한 메일들은 내가 자주 드나드는 카페에 퍼다 날랐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시계는 아침 7시를 가리키고 있다.

컴퓨터를 끄고 반신욕을 하러 욕탕으로 들어가 30분쯤 반신욕을 하고 나니, 몸과 마음이 상쾌했다. 예년 같으면 설날 아침이면 큰아들 내외와 손자손녀들이 찾아와 집안이 시끌벅적할 텐데 오늘따라 아침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 조금 과장하면 내 발자국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린다.

아내랑 떡국을 먹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의정부에 사는 큰손자 동현이의 전화였다. 벌써 차례를 모시고 할아버지한테 전화로 세배를 드리는 것이라 했다.

“동현아, 너는 이제 몇 살이지?”

“열 살이에요.”

설날이면 남녀노소 누구나 한 살씩 나이를 먹는다. 나이를 한 살씩 더 먹은 큰며느리와 큰아들이 차례를 모시려고 새벽부터 서둘러 준비했던 모양이다. 고희의 고개를 넘기면서 설과 추석 명절 차례를 큰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어느새 이태나 지났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이른 아침부터 세배꾼들이 몰려들기 때문에 차례를 서둘러 모셔야 했다. 그때 찾아오는 아이들마다 세뱃돈을 주어야 했기에 미리미리 새 돈을 준비하는 일은 내 몫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부터는 세배꾼들이 오지 않는다. 세배꾼들은 썰물이었다. 그렇다고 우리 집으로 세배를 오면 세뱃돈을 주겠다고 호객행위를 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내가 세배를 드려야 할 어르신도 아니 계시고 세배를 오는 이도 없으니 우리 집의 설날은 무척이나 한가롭고도 쓸쓸하다.

거실 소파에 앉아서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켰다. KBS-2TV에서는 평소 내가 즐겨 시청하던 <퀴즈 사총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설날특집으로 꾸며져서 그런지 어른 4명이 어린이 한 명씩을 데리고 나왔다. 2인1조다. 1단계 문제는 어린이들이 손쉽게 풀어서 2단계로 넘어갔다. 어린이들의 일반상식 실력이 대단하구나 싶었다. 2단계 문제는 객관식 3지선다형이었다. ‘엄마의 오빠의 부인’을 무엇이라고 부르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①사모님’ ‘②외숙모’ ‘③이모님‘ 세 가지 중 하나를 고르면 되었다. 그런데 어떤 여자어린이가 ②를 골랐다가 ①로 바꾸었다. 정답을 골랐다가 바꾸는 바람에 틀린 답이 되어버렸다. 확신 없이 찍기를 한 탓이다. ‘외숙모’를 모르다니!

옛날 어린이들이라면 이 정도 문제를 풀기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들딸 한둘밖에 낳지 않는 요즘 가정에서 자란 어린이들에게는 실로 어려운 문제일지도 모른다. 고모, 이모, 큰어머니, 작은어머니, 외숙모,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심촌, 외삼촌 같은 가까운 호칭조차 부르지 못하고 자랄 테니 말이다. 평소에도 불러보지 못한 호칭이니 국어사전을 찾아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요즘 어린이들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국어사전을 찾아볼 일이 더 많아질 것이다.

아내와 더불어 교회에 갔다. 여느 일요일과는 달리 교회당 안에도 빈자리가 많이 눈에 띄었다. 설 쇠러 고향에 가거나 역 귀향을 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인 것 같다. 집에 도착하자 딸네식구들의 전화가 걸려 왔다. 딸 내외와 외손자 형제가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했다. 또 이어서 미국 샌디에이고에 사는 작은아들네 식구들의 전화도 왔다. 미국달력에는 설날 표시가 없다고 한다. 앞으로는 우리나라 달력을 하나 보내주어야 할 것 같다. 여러 군데서 설날축하메일과 문자메시지, 카카오톡이 많이도 왔다. 올해도 지난해 못지않게 복을 많이 받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오후엔 영화관을 찾았다.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에서는 윤학렬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최수종 주연의 영화 <철가방 우수氏>를 상영하고 있었다.

고아로 자라 가난과 분노로 얼룩진 삶을 산 우수 씨의 인생은 마치 좁고 어두운 감방과도 같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놓아버리려고 생각한 그때, 가난한 사람도 누군가와 정을 나눌 수 있음을 알게 해준 ‘불우한 아이들’과 기적처럼 만났다. 그 만남은 우수 씨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우수 씨는 중국집에서 철가방으로 중국음식을 배달하면서 70만원의 월급을 받아 아낌없이 아이들을 도와준다. 우수 씨는 그 아이들의 사진을 조그만 액자에 담아 자기 방에 세워두고 시시때때로 쓰다듬으며 눈을 맞춘다.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들어 본 ‘감사하다’는 인사는 평생 외로웠던 우수 씨에게 행복한 나날을 선물했고, 서로가 서로에게 전하는 뜨거운 감사는 이제 삶의 원동력이자 살아야 할 이유가 되었다. 고시촌쪽방에 사는 밑바닥 인생들도 착한 우수 씨를 본받아 서로 돕는 이웃사촌으로 변해간다. 그러던 어느 날, 우수 씨가 자장면을 배달하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유가족이 없는 우수 씨의 시신은 규정상 화장을 해야 하기에 그의 시신을 실은 앰뷸런스는 화장터로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장례식이라도 갖고 싶은 쪽방촌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인맥을 동원하다가 용케도 어느 부장검사의 도움으로 장례식을 치르게 된다. 우수 씨의 도움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가득 모여 우수 씨의 선행(善行)을 추모한다. <철가방 우수 氏>는 고 김우수 씨의 실화를 100분짜리 영화로 만든 작품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감동적인 방화였다.

설날 영화관을 찾는 것은 내 평생 처음의 일이다. 설날 오후, 전주 영화의 거리에는 젊은 대학생또래의 선남선녀들이 파도처럼 출렁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나도 나이를 한 살 더 먹은 뜻 깊은 설날을 보내고 있다.

(2013. 2. 10.)

*김학 약력

198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나는 행복합니다》등 수필집 12권,《수필의 길 수필가의 길》등 수필평론 2권/ 펜문학상, 한국수필상, 신곡문학상 대상, 연암문학상 대상, 영호남수필문학상 대상, 대한민국 향토문학상, 전주시예술상, 전라북도문화상, 목정문화상 등 다수 수상/ 전북수필문학회 회장,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장, 임실문인협회 회장, 전북문인협회 회장, 전북펜클럽 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이사장 역임/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전담교수/

E-mai: crane43@hanmail.net http://crane43.k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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