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부인의 남편일기)
(080728-1140)
축축 히 젖어있는 베게를 나는 오늘 아침도 말없이 햇볕에 말린다.
우리 사회가 안겨준 I M F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이 무엇인지 아직은 실감 나지를
않는다.
어느 날인가, 대통령은 매스컴을 통해 금융위기가 닥쳐왔다 하였고 연일 방송에서 난리 법석 이었다.
단란한 우리가정도 그 여파를 피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남편은 건설관련 업종에 근무하고 어느 정도 기반을 다져가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찌 보면 순수한 눈웃음에 내가 반하여 결혼 하였는지도 모른다.
단칸방에 살면서도 남편은 늘 내게 큰소리 아닌 큰소리를 친다.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멋지게 돈벌어 우리 마누라 행복하게 해주고 좋은 집 사준다고
하였다. 그것이 그냥 하는 소리란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것이 싫지는 않았다.
처음 결혼을 하고 일년간 아이가 생기지를 아니하여서 혹 내가 영구 불임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눈물을
흘릴 때마다 남편은 항상 말하곤 하였다.
둘이 사랑해서 만난 것인데 아이는 없어도 된다며 흐느껴 울고 있는 나를 항상 달래주곤 하였다.
그렇게 일년 동안 불임으로 유명한 병원을 다닐 때도 남편은 늘 새벽같이 일어나 병원 업무시간에 맞추어
항상 예약을 하곤 하였다.
당시에는 항상 당일 선착순 예약이어서 늦게 도착하면 내가 원하는 시간에 맞는 예약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남편은 내가보기에 늘 부지런함이 몸에 베어있는 것 같다.
그렇게 일 년의 시간을 병원을 다녀서 어렵게 첫째 딸을 임신하게 되고 입덧이 심한 나를 일년 동안
남편은 불평불만 없이 뒤에서 잘 보좌를 해주었다.
첫딸을 낳고 너무 힘든 산통을 하였기에 처음에는 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래도 남편은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연신 싱글벙글 이었다.
병원을 퇴원하고 남편은 언제나 그렇게 끔찍이도 딸을 아끼고 사랑스러워 했다.
저녁이면 항상 딸을 옆에 눕히고 책을 읽어주기도 하고 자장가를 불러주기도 하였다.
그러한 남편의 사랑이 영향 이었던지 딸은 언제나 밝고 활기차고 감수성이 풍부하였다.
다른 또래의 아이들과는 사뭇 다른 조금은 성숙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자라서 네 살에 한글을 알고 스스로 일기까지 쓸 줄 아는 그러한 아이가 우리
딸 이었다.
가끔씩 딸의 일기장을 펼쳐보고 내 자신이 깜짝 놀라는 그러한 말들까지 쓰는 것을 보고
저애가 과연 네 살짜리인가 싶은 의구심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지나고 나서 느끼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남편의 지독한 사랑과 정신적인 교육이었으리라.
딸 또한 아빠를 무척이나 따랐다.
얼마 전의 일이지만 시집의 큰 일 때문에 딸을 며칠간 언니 집에 맡겨 둔 적이 있었다.
용케도 울지 않고 잘 적응하여 일을 치루고 언니 집에 도착하니 엄마는 안중에도 없고
아빠~~~ 하고 아빠 품에 먼저 안기어 엄마를 실망시키기도 하였지만 그것이 아빠가
가족에게 베푼 사랑일 것이다.
딸이 네 살이 되고 그해 겨울은 왜 그리도 쓸쓸하던지 I M F가 터지고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남편의 일감마저도 별로 할 것이 없기에 축 늘어진 남편에게 힘내라고 짜증도
부려보고 돈 벌어오라고 바가지도 긁었던 기억이 새삼 내 가슴을 짓누른다.
남편은 건설 공사 일을 하는 사람으로 나름대로 그 분야에서는 인정받는 기술자였다.
I M F의 구제 금융역시 우리에게 엄청난 시련을 안겨 주었다.
남편이 일을 받아서 하는 회사의 부도로 그 회사에서 발행한 어음을 받았던 우리는 졸지에
모든 것을 잃어야 했다.
들고 있던 보험과 모든 적금을 해약하고 대금을 지불하고 나니 남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달랑 남은 전셋집 한 칸에 남편은 어이가 없는지 일손을 놓고 말았다.
그렇게 10개월 정도를 살아보니 가정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축 늘어져 있는 남편의 어깨는 더 이상 어떤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술은 마시지 않는 남편이기에 내심 한 가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
지금에 생각하면 다행이었다.
근근 히 남편의 실업 급여라는 것으로 한달 생활비를 썼고 언니의 도움과 가끔씩 남편이
주위의 지인으로부터 일거리를 제공받고 그 돈으로 우리는 한달을 살수 있었다.
I M F가 터진 다음해 겨울이 되어 남편은 갑자기 객지에 돈벌러 가겠노라고 하며 주섬주섬
옷가지와 남편이 사용하는 연장을 챙기었다
남편이 몰던 1톤 화물차에 연장을 실고 떠나는 날 아침 나는 그렇게 많은 눈물을 태어나서
흘려 본적이 없었다.
물론 당시에 남편은 딸에게 아빠의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남편이 서울로 가고 덩그렇게 나와 딸만 저녁에 집에 있으니 적막강산이 따로 없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딸이 나에게 아빠는 어디 가셨냐고 묻기에 저녁상을 치우고 딸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니 딸은 그냥 말을 하지 않고 자고 싶다고 한다.
그날따라 좋아하던 책을 읽어 주려고하나 딸은 오늘은 그냥 잔다며 돌아누워 버렸다.
밤 열두시가 넘은 시간 불을 끄고 잠시 눈을 붙였는가 싶었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떠 보았다.
딸의 자는 모습을 보니 무언가 이상하여 일어나서 돌아 누워있는 딸을 살며시 들여다보니.
울고 있었다. 우는 모습을 엄마가 볼까봐 돌아누워서 그렇게 두 시간 이상을 울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내 내 품에 안겨 내 옷을 적시며 딸은 그렇게 한 시간을 소리 내어 울지 않고 눈물을 흘리다 잠이 들었다.
그렇게 며칠을 나는 딸의 베게를 아침이면 햇볕에 말렸다
남편에게 이런 얘기를 하니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를 못한다.
다음날부터 딸은 상냥함과 밝은 모습의 얼굴이 조금 없어진 것 같았다.
가족의 소중함이란 정작 모든 것이 있을 땐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한 부분이라도 없으니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다.
매일저녁 남편은 전화를 걸어와 딸과 나를 위로한다.
딸은 아빠의 전화를 받을 때는 가장 밝은 얼굴을 한다.
그렇게 시간은 또 흘러가고 I M F의 아픔도 우리들에게서 조금씩 멀어져 가고 2년의 고생을 뒤로하고
남편은 서울에서 내려와 다시 본업에 뛰어 들어 나름의 생활을 시작해 갔다.
사회생활을 잘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지만 남편의 마음은 언제나 양보하고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기에 나와는 항상 다툼의 대상 이었다.
왜, 내 것을 챙기지 못하고 나도 못 사는 주제에 남의 것만 챙기느냐며 남편은 항상 나에게 핀잔을 들었다.
나는 남편의 그러한 모습이 너무나 싫었다. 내가 먹고살기에도 빠듯한데 다른 사람 어렵다고 내가 번 돈 왜
남을 도와주느냐는 것이었다.
I M F이후 나는 남편이 미울 정도로 남편의 사회생활 방식이 싫었다.
일하는 모습이나 가정생활 다른 것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항상 빠듯한 살림이었지만 그런대로 살아가는
형편이었기에 조금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돈을 벌수 있기에 남편을 다그쳤던 것이다.
남편은 항상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과 사회생활에 대해서는 그렇게 상세히 나에게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딸의 동생도 생기고 식구가 늘어 우리는 단란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남편또래의 사람들은 벌써 집을 마련하였지만 우리들은 그렇지를 못했다.
남들보다 두 배는 일을 하는 것 같아도 남편의 벌어오는 수입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작은 회사를 꾸려 나가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잘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남편은 사회활동도 많이 하는 것 같았고 나는 남편이 하는 모임이나 사회활동에는
큰 관심이 없었기에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어느 여름 날 이었다. 무더위가 지지리도 기승을부리던 8월초이었던 같다.
남들은 휴가준비에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남편은 그렇지를 못했다.
직업상 그렇기 때문인지 휴가 기간 중에 공장 보수를 해야 한다고 밤늦게까지 일하고 땀으로
범벅이 되어 저녁 늦게 돌아온 남편의 옷은 그냥 버려야 하였다. 시커먼 기름먼지에 얼굴은
햇볕과 열에 그을려 웃을 때 새하얀 이만 드러날 뿐 온몸 전체가 말 그대로 먼지와 기름투성이였다.
옷도 벗지 않고 들어오는 남편을 통해 신경질 적으로 한마디 내 던져본다.
“입구에서 옷이나 벗고 들어와요! 남들 다 여름휴가 가는데 우리는 이게 뭐야” 라고
소리치니 남편은 그냥 말없이 욕실로 향하고 샤워를 하더니 피곤했던지 그냥 쓰러져 잔다.
아빠를 극진히도 아끼던 딸은 나를 보고 나무란다.
아빠 힘들게 일하고 오셨는데 엄마가 짜증내면 어찌 하냐며 나에게 아빠한테 잘해주라고 한다.
그 소리를 들으니 더욱 신경질이 나고 나는 잠시 나갔다 오겠다며 딸보고 동생 좀 보고 있으라
하고 옆집의 친구랑 소주 한잔을 기울이며 신세 한탄과 함께 술을 많이 마시고 2시가 조금 넘은 시간
집에 들어오니 딸이 그때까지 자지 않고 울고 있었다.
딸은 동생을 재워 놓고 아빠 옆에서 그냥 하염없이 울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금은 취해 있었기에 남편 옆으로 다가가니 남편은 끙끙 앓으면서 연신 신음을 토해내며 부르르 떨고 있었다.
이마를 짚어보니 뜨거워 만질 수가 없었다. 금방 먹은 술이 확 깨였다.
어찌할 수없는 마음에 급히 앰뷸런스를 불러 병원 응급실에서 응급처치를 하고 겨우
안정을 시키고 링거를 한 병 맞고 나서야 남편은 곤히 잠을 자는 것 같았다.
도중에 눈을 뜨고 남편은 무어라 중얼거린다. 하루 지나면 나을 것인데 뭐 하러 병원에는 오느냐 했다.
의사의 말이 극심한 피로와 탈수로 인하여 몸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당분간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아침이 다되어서 남편은 일어나고 그냥 쉬라는 말을 뒤로하고 집으로 가자며 나의 손목을 잡고 막무가내로 병원을 나선다.
집에 도착하여 대충 아침을 먹고 남편은 만류하는 나를 뒤로하고 곤히 자고 있는 딸의 볼에 뽀뽀를 하고출근을 하였다.
간밤의 일을 생각해보면 내가 심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출근하는 남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마디 외쳐본다.
"그 고생을 하며 돈은 벌어오지도 못할 거면 뭐 할려고 일을 해요" 라고 그냥 출근하는
남편 뒤에다 소리를 쳐본다. 남편은 그냥 머리위로 손을 흔들고 묵묵히 화물차에 몸을 싣고 출근을 한다.
그것이 남편의 마지막 뒷모습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체 나는 그날도 한가롭게 방의 에어컨을 털어놓고
그냥 컴퓨터 오락에 옆집 아줌마랑 수다를 떨고 남편 흉도 봐가며 하루를
지낼 즈음 남편과 같이 일하는 사람으로부터 청천 벽력같은 전화를 받고 내 몸이 얼어 붇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 현장에서 높은 곳에서 일하다가 발을 잘못 디뎌서 추락 하였는데 지금 병원 응급실에 갔는데 위독하니 빨리
병원으로 가라고 하였다.
부랴부랴 병원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이미 남편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있었다.
차마 남편의 시신을 보지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
이렇게 갈 거면 뭐 하러 나와 결혼했냐며 통곡을 하고 울어도 가슴에 맺힌 덩어리를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장례를 치루는 동안 딸은 너무나도 침착하였다. 아빠를 잃은 슬픔이 오죽 할까마는 딸은 내 앞에서 울지를 않았다.
그냥 간간히 눈물만 보일뿐 나를 오히려 위로를 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더욱 내 마음을 찢어지게 만드는 것 같아 몸서리를 치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남편을 한줌의 재로 보내고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그냥 멍하게 며칠을 지내고 있었다.
이제 5학년이 된 딸은 어느 날 나에게 할 얘기가 있다며 나를 부른다.
여름 방학이 어느 정도 끝나가고 있었지만 마음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가슴에 통한의 나날만 보내고 있을 때이다.
생각하면 남편에게 잘못했던 것 만 떠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있을 때 잘하란 말이 실감나는 요즘이다. 그렇게 딸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엄마 나도 아빠를 생각하면 보고 싶어 미쳐 버릴 것 같아 엄마가 이러면 내가 힘들어 지잖아,
이제 우리는 아빠 없는 세상에서 살아야하니 엄마가 매일 울고 지내면 어쩌겠어,
동생도 돌봐야하고 이제는 우리가 아빠 몫 까지 다 해야 하잖아,
그 말을 하고나서 딸은 이제껏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고 가슴에 사무쳤는지
아빠~~! 아빠~~~~! 연신 소리 내어 우는 것을 보니 나도 눈물이 나와 둘은 한참을 그렇게 울고 또 울었다.
딸이 울고 싶은 것을 얼마나 참았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 정신을 차리고 이젠 무슨 일을 하던지 한번 열심히 살아보자며 딸과 함께 다짐의 다짐을 하고 또 해본다.
딸이 개학을 하고 남편이 하는 사무실도 정리를 하고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고 있을 즈음 사무실의 직원이었던
아가씨가 왼 파일 하나를 들고 온다.
사장님 책상에 있던 것인데 이것저것 서류정리 하다가 버릴 것은 버리고 이것은 사모님께 드려야겠기에
드리는 것입니다. 라고 말을 전하면서 사장님 같으신 분은 아마도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다면서
한줄기 눈물을 흘리며 말을 대신한다.
봉투 속에는 편지 한 장과 함께 생명보험 증권 세 가지와 적금통장 하나가 있었다.
그 편지를 읽고 또 한번 나는 울고 말았다.
그렇게 길지 않은 내용에 남편은 혹시라도 일어날 일을 예견이라도 하는듯하였다.
편지의 내용인즉 이러 하였다.
"내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들에게"
못난 아빠로서 못난 남편으로 내가 우리가족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지 못해 항상
미안하구나,
그저 한세상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내 인생의 목적이거늘 늘 당신에게는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 같구려,
어찌하건 내 가족을 더 없이 사랑하고 아끼기에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르는 일에 이렇게
틈틈이 보험과 적금을 들어놓았습니다.
이것이 끝까지 다 채워서 당신께 드릴 수 있다면 그것이상으로 고마운 것이 없겠지만
세상은 참으로 험악하기에 앞날의 운명을 어찌 알겠소,
이것이 우리 가족에게 보탬이 되고자 함이며 내가 우리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만약을 염두에 두고 들어 놓은 것이니 만약이라는 경우가 생긴다면 좋은 곳에 쓰도록 합시다.
뭇 난 가장이 그냥 써놓았습니다.
그렇게 자기의 일을 예견이라도 하듯 남편은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한 듯 하였다.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닦지 않고 그냥 또 얼마간을 울었다.
살아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잘해 줄 것을 속으로 되 뇌이었지 만 남편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시간은 모든 것을 잠재운다고 하였던가,
남편의 상처도 어느 정도 아물어가고 있었고 딸과 아들도 어느 정도 적응을 해가고 있었다.
정부에서 나온 보험금과 남편의 생명 보험으로 우리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일 년의 시간이 지나고 남편의 기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휴일을 택해 딸과 아들과 함께 남편의 납골당을 다녀오고 그냥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남편의 기일을 위해
음식 준비를 할 즈음에 낮선 사람 네 분이 찾아 오셨다.
나이로 보아서는 다들 같은 나이는 아닌 것 같았다. 대학생인 듯한 20대 초반의 남자 둘과
30대 후반 정도 되는 아주머니 한분과 남편과 같은 또래인 듯한 남자 분이었다.
집으로 들어오더니 내손을 잡고 다짜고짜 울면서 늦게 찾아와서 미안하다며 네 분들은
대성통곡을 한다.
지인을 통해서 들은 것이라며 아주머니 한분은 그렇게 슬피 울면서 또 내 가슴을 흔들어 놓았다.
그분들의 사연도 가지가지이지만 대학생인 듯한 남자 둘은 남편과 우연히 알게 된 사이로 남편이
일년 동안 학비 모두를 보태주고 틈틈이 학생들의 뒷바라지를 해 준 덕택에 이제는 도움 없이도
스스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고 하였고, 아주머니 한분은 남편과 친구지간이었던 사람이
불의의 병마와 싸우다가 갑자기 세상을 등져 병원비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기의 가족을 뒷바라지
해주었다며 이 은혜를 언제 다 갚을 것인가 라며 한없이 울고만 있었다.
이렇게 가실 거면서 무엇 하려고 우리를 도우셨습니까, 라며 남편의 초상화를 보고 울고 또우는 모습을
보는 나는 남편이 죽도록 미워지기도 하였다.
나도 몰래 남에게 저런 배려를 하면서 겉으로는 얼마나 태연했던 남편 이었던가,
정녕 나는 우리 가족과 남편에게 무엇 이었던가, 가슴에 억눌린 감정 때문에 복 받치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어서 밖으로 뛰어나가 또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이 세상에 구구절한 사연들은 참으로 많겠지만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싶었다.
남편과 동년배 인 듯한 사람 역시 그 나름의 사연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분 역시 남편의
지극한 도움으로 실패한 사업에서 일어 설수 있었다며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분들과 한참동안을 이야기 나누고 일어 설 즈음에 그분들의 마음이라며
봉투를 건네주며 남편의 친구 인 듯한 그분이 말을 하였다.
“똑 같은 심정으로 돌아가신 당신께서 우리를 도우셨던 것 같습니다.
훌륭하신 분을 내 인생에 뵐 수 있었던 것은 내 인생 최고의 행복으로 여기겠습니다.
또한 안타깝게 운을 다하신 그분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슬픔이기도 합니다.
부디 사양치 마시고 그분의 은혜에 보답하기에는 아직 우리가 갈 길이 멉니다.
그분의 도움으로 우리가 일어설 수 있음 이기에 작은 성의라 생각하시고 받으셔야 합니다.
우리 외에도 남편 분께서 힘쓰신 분이 더 계실 것인데 가신분의 뜻을 받들어 당신의 운명을
전하고 그분들을 우리가 돕도록 하겠습니다."
그 분들을 보내고 밤이 되어서 딸, 아들과 함께 제를 지내고 세 식구 모여앉아 나는 아들과
딸에게 얘기를 하였다.
“아빠는 이 세상에 그 누구보다도 훌륭하셨고 참으로 사람다운 모습을 가지셨던 분이다.
너희가 평생을 가슴에 두고 살아가야 하는 분이고 가장 존경해야 할 분이다.
돌아가신 아빠에게 보답하는 길은 아빠와 같은 사랑을 너희도 가져야 하고 실천하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마음 아파하는 것도 이제 그만 가슴속에서 지워 버려라. 그리움이
크겠지만 이제는 마음속에 우상으로 남겨두고 항상 사랑하며 살자구나 ......,
말끝을 흐리며 우리는 이것이 마지막으로 흘려야 하는 눈물이기를 바랬다.
남편의 그림자를 마음속에서 지울 수는 없지만 그냥 가슴속에 묻어두고 힘들 때마다
잠시 꺼내어 내 마음의 위로를 삼아볼까 싶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세월 이란 것에 잊혀져가는 남편의 모습이 허망하게 느껴지지만
또한 인생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나의 운명 인지도 모른다.
간간히 남편의 도움이 필요했던 분들의 연락도 가끔씩 접하고 나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한 남자의 아내로 살면서 백년해로를 다 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남편을 보냈고 살아생전에
남편에게 구박하고 못된 말도 많이 한 것이 가슴에 한이 되어 남아있지만 어쩌면 그것이
내 인생의 아름다운 밑거름으로 되어 남편의 사랑을 이제야 깨닫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가슴 아프지만 또한 지금이 내 인생에서 마음이 가장 행복한 시기인지도 모른다.
아니 앞으로 나는 가장 행복한 사람 일 것이고 남편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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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머리에
글을 쓰는것은 다분히 일상의 이유는 없다
그저 생활의 반성이고 나 자신에 대한 자아의 발견 쯤이라고나 할까,
이글을 쓴 이유중의 하나는 내가 남편으로서 살아가는 이유를 묻고 싶었고
내 인생에 대한 견해를 스스로 나에게 묻고 싶었다.
짧은 식견으로 다쓰고 나서 읽어보니 문장의 표현이나 언어의 적절한 구사가
잘 이루어진것은 아닌것 같다.
남자의 입장에서 아내를 폄하 하는것은 더더욱 아니며 아내를 사랑하기에
더더욱 열심히 노력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쓴 글이다.
자랑 하고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며 단지 내가 쓴 하나의 글이 인터넷 이라는
공간에 던져저 혹평을 받던 비난을 받던 게의치 않는다.
이글의 주인공인 남편은 나 자신일수 있으며 또한 등장하는 인물은 우리가 무심히
지나칠수 있는 내 가족일수 있을 것이다.
다분히 공감할수있는 내용일수 있지만 그내용의 의미는 어찌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 인것이다.
남자가 바라보는 남편의 시각을 미화하고자 함도 아니며 아내의 성격을 나쁘게 평가
하고자하는것도 아니다.
스스로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싶은것이 나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글의 특성을 살리고자 함은 아니었지만 남편을 죽인것은 비극일수도 있슴이리라,
남편의 사회생활이 올바르다는것을 알리기 위함이고 나중에 찾아오는 아내의
인생과 가족의 행복이 남편의 아름다운 희생으로 빛이 났다는 것을 나름대로 표현하고
싶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끝임없이 고민하고 끝임없이 배려하며 사는것은 아닌가라고 묻고 싶다
글쓴이 -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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